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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혜경 단편소설 『그 집 앞』

by 언덕에서 2024. 4. 18.

 

 

이혜경 단편소설 『그 집 앞』

 

 

이혜경(李惠敬, 1960~)의 단편소설로 1998년 발표되었다. 그해 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그 집 앞」은 '큰어머니와 어머니 두 어머니'를 둔, 소실의 딸로 태어난 주부의 이야기다. 역시 서출인 시어머니와의 불화, 청각세포가 죽어가는 병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로부터 멀어져 가는 남편과의 부조화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알코올에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 사회 가족과 여성의 자기 정체성의 의미를 묻고 답한다. 해답은 고독 속에서도 공생하는 삶이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살아내리라’는 주인공의 다짐이 그것을 암시한다. 작가는 1995년 [오늘의 작가상]과 독일의 [리베라투르상] 장려상을 받았다. 이후 제13회 [이상문학상]과 200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포목상을 운영하는 시어머니와 같은 집에서 사는 중년 여인이다. 나는 시어머니와의 동거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소실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고위공무원의 막내딸인 손아래 동서와 비교하며 모멸감을 주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역시 둘째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스트레스로 인해 나는 시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마다 대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경향이 있다.

 시어머니는 나와 남편의 궁합이 맞지 않아 남편의 귀가 먹어간다고 믿고 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님이 시누이의 해산구완을 위해 집을 잠시 비우고, 그 시간을 틈타 남편에게 시어머니와의 생활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토로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약속에 조금 늦어지게 되고, 나는 모교(고등학교)에 잠시 들러 과거를 회상한다. 이후 남편을 만나지만, 끝내 남편에게 자신의 마음을 터놓지 못한다. 남편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나는 과거를 회상한다. 식사 후 남편과 드라이브를 하다 대학시절 하숙했던 동네로 가게 된다. 그러다 삭은 집, 그 집을 발견한다.

 나는 그때 함께 하숙했던 순정 언니를 생각해 낸다. 의족을 했음에도 꿋꿋하게 살았던 모습도 떠올린다. 그리고 춤을 잘 추었지만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던 정육점 딸을 떠올린다. 그러다 나는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전 친정어머니가 거지에게 돈을 줄 때도 ‘거지는 사람이 아니냐’며 두 손으로 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 나는 토했던 배설물을 흙으로 살짝 덮고 자리를 벗어난다. 나는 오히려 남편이 청각 장애를 가질 운명이라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남편을 더욱 사랑해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소설가 이혜경 ( 李惠敬 , 1960~)

 

 이 작품은 과거 회상 장면이 많기 때문에 위에서 서술한 줄거리보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과거 회상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다. 과거 회상의 순서는 순차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역순행적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가까울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 그러나 이 회상 장면의 공통점이라면, 주로 여성의 의식을 다룬다는 점이다.

 큰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 여기에서의 큰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실을 의미한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소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실과 소실 사이의 갈등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소실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실과 소실 사이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과거 여성들의 수난과 표출하지 않음으로써 거기에서부터 오는 한 마저도 더욱 애잔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장치로 판단된다. 소실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보다는 큰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듯 큰어머니와의 추억에 더 많은 분량을 쏟는다. 또한 시어머니가 주인공이 소실의 딸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점에 불만이 있으나, 시어머니 역시 소실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결국 주인공 ‘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수긍하고 이에 더하여 남편에 대한 사랑을 다짐한다. 작품은 이처럼 극적인 반전 없이 평이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못하는 장면과 자신의 어머니가 소실로 살면서 겪었을 고초와 내면적 갈등이 작품 전면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이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주제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점은 여성이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주장하는 숨은 장치인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시작된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부터라고 하고 중동사회에서 여성에게 차도르를 의무화한 시기는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입이 시작된 후부터라고 한다. 

 위의 소설은 어느 소시민의 가족보고서 같은 내용이지만 억압된 여권이 숨어있으며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황석영 작가는 되도록 감정을 억제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하여 정황을 드러내는 이혜경 작가의 필력이 마치 ‘여자 염상섭’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