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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조해일 단편소설 『뿔』

by 언덕에서 2024. 4. 10.

 

 

조해일 단편소설 『뿔』

 

 

조해일(趙海一, 1941~2020)의 단편소설로 1998년 발표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뒤로 걷는 사나이다. 아니 지게에 이삿짐 따위의 짐들을 잔뜩 싣고 자동차가 질수하는 시내 도심을 달리기까지 하는 이 분야 최고의 프로 역주행 전문 짐꾼이야기다.

 조해일은 1970년대 초까지는 작가의 상상적 세계였던 가정 파괴범에 의해 순박한 신혼생활이 산산조각 난 <무쇠탈> 연작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시대에 만연된 폭력의 정체를 우회적으로 밝히려 했으며, 1980년대에는 눈에 보이는 뻔한 폭압적 상황에서 감추면서 이야기하는 우화적 수법에 염증을 느끼고 글쓰기의 중노동에서 벗어나 문단과 담을 쌓고 교수생활로 들어가기도 했다.

 작가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무자비한 폭력의 횡포에 대한 공포감을 즐겨 주제로 삼는 그의 작품은, 그러나 다양한 수법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미학적으로 융화시키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 「뿔과 같은 단편은, 노동 또는 장인(匠人)들이 지닌, 육체적인 힘이 과시하는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다른 작품들은 그러한 힘 또는 단순함이 악용되어 횡포스런 폭력으로 자행될 때 일어나는 기습적인 공포와 전율을 전달해 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포함, 중산층들이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빠져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 일상적 삶의 부도덕에 대한 수치심(羞恥心)을 일깨울 수 있는 작품을 쓰겠다. “

 

소설가 조해일 ( 趙海一 , 1941~2020)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하숙집을 옮기려는 가순호는 왕십리 역전 공터에서 한 지게꾼을 고른다. 그 지게꾼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각목과 합판으로 계량화된 무수한 지게들 가운데서 원래의 가지 그대로 자연목을 쳐내어 만든 것 같은 지게를 가지고 있는 임자였기 때문이다. 그 지게는 유난히 길고 견고해 보이는 네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 지게의 몸통을 이루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두 개의 지게 뼈와 몸통에서 뻗어 나와 약간 위를 겨눈듯하게 지평을 을 향한 두 개의 지겟가지가 그것이다.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는 모윤숙의 목이 길어 슬픈 ‘사슴’처럼 네 개의 뿔을 장착한 그 지게가 군계일학처럼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지게꾼이 하숙짐이나마 이삿짐을 지고 가야 할 길은 왕십리역에서 흑석동까지 12.3km, 보통 걸음으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게꾼은 지게를 지고 거꾸로 걷는다. 거꾸로 걷는 지게꾼의 모습은 영락없이 뿔을 내세우고 나아가는 짐승의 모습이다. 그는 빈손으로 가는 가순호보다 기운차게 걸어간다. 심지어 거꾸로 달리기까지 한다. 가순호는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하지만 이내 그 동작의 의외성에 아름다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어젯밤에 자기 집에서 쥐 잡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쥐가 큰방, 작은방, 윗방, 아랫방, 거실, 침실, 서재를 거쳐 식모방, 기사방, 정원사방까지 도망쳐서 간신히 잡았다며, 집 자랑을 하였다는 초등학생들의 집자랑 이야기처럼, 이들이 지나치는 길가 풍경 간판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진다.

 그들은 왕십리에서 출발하여 중국음식점 ‘육합춘’을 지나고 ‘광무극장’도 지나, ‘박산부인과 병원’, ‘아리랑사진관’, ‘양지카바레’, 무슨 무슨 편물점, 양화점, 가구점, 오토바이센터를 지난다. 시구문을 지나 퇴계로로 접어들어 동국대학 앞을 지나, 성심병원 앞을 지나고 아스토리아 호텔 앞을 지나 다시 프린스 호텔 앞을 통과하여, 결혼회관 앞을 지나 산업경제신문사, ‘DP&E, 블론디’, ‘정건강관리연구소’, ‘서울특별시 농업협동조합’, ‘교통센터’, ‘USO' 앞을 지난다.

 이들의 진기한 역주행을 보는 정지한 차량과 버스 속의 승객들이며 거리의 보행자들, 심지어 교통순경까지도 적의보다는 웃음을 터트린다. ‘가만히 있으면(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으면) 중간은 간다’고 가르치며, 주어진 사회 질서에 순응하고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 할 것을 종용하고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의 기이한 걸음이 던져주는 야릇한 ‘해방감’ 때문이다.

 “지게꾼은 개가 무섭다고 한다. 특히 길들여진 무는 개가 무섭다고. 밥을 주는 주인에게는 꼬리치지만 주인 외의 사람에게는, 특히 한번 약점을 보인 사람에게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물어뜯을 준비를 하는 길들여진 개가 무섭다고. 그러고 나서 지게꾼 사내는 마치 현자처럼 말한다. 등만 보이지 않으면 절대로 물지 못한다고.”

 그렇게 한국인 양공주를 거느린 흑백의 미군이 서있는 용산 미군부대의 긴 벽돌담을 끼고 걷고 있을 때 지프차를 탄 형과 만난다. 형은 육사를 나온 중령으로 좋은 처세술로 진급이 빠른 반면 동생인 가순호는 나름 가치를 추구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 형은 동생에게 정신차리고 현실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훈계한다.

 잘 길들여진 개, 주인이 물라고 명령하면 무는 개, 승진과 일신의 영달이라는 달콤한 마력에 빠져 정당성 없는 권력의 개가 되어 정작 주인인 국민을 무는 그런 미친개들을 많이 보아온 입장에선 할 말이 없다. 정작 정신을 차려할 당사자들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소설 「뿔」은 작가가 세세한 인간의 행동과 그 표정까지도 얼마나 치밀하게 정서적 가치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가순호’가 왕십리에서 흑석동까지 그의 이삿짐을 옮기는 과정이 이 작품의 근본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선적 구조 위에 배열된 여러 가지 삽화들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을 유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점을 간과할 경우, 이 소설에서 충만하고도 유익한 삶에 근접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참모습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 의도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소설 「뿔이 갖고 있는 작품 구조상의 밀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이 작품에서 지게꾼을 통한 인간의 참모습에 대한 주인공 ‘가순호’의 관찰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 주인공 자신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 대한 이해의 관건은 주인공인 ‘가순호’가 가족들과 떨어진 채 이리저리 이사 다니게 된 개인적 동기와 사회 전체의 모습이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느냐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에 있다.

 

 

 주인공의 부모는 변두리 교회 하나를 맡아서 하느님만 갈구하며 살고 있다. 맏형은 정치적 신념도 없으면서 타성적인 야당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형은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임관 이후 어느 동기생보다 빠른 진급으로 중령에 이르렀다. 누이동생은 미국인 상사의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여고 때 이래의 도미 계획을 착착 실천에 옮기고 있다. 셋째 형은 이상주의자다운 명석한 조직 능력도 없이 무턱대고 노동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 가순호 자신은 잡지사 근처에 있는 다방에 드나들며 책 읽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어쩌다 글줄이나 얻어 싣게 되거나 번역 거리라도 맡게 되면 거기서 얻는 푼돈으로 간신히 하숙비나 물게 되는 것이 고작이다

 이렇게 주욱 머리에 떠올려 봐도 누구 하나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건 그리고 개답게 살지 못하는 개와 다를 바 없다. 이를테면 짖지 않는 개가 무슨 개란 말인가. 하긴 무는 개가 있기는 하다. 인용으로 보아, 주인공 ‘가순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가족들과의 관계에 근거한다. 그의 가족들은 각각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모든 양식을 망라하고 있지만, 전혀 인간답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가 문제이다. 구체적인 소설적 장면에서 이러한 문제가 노출된 것은 주인공과 그의 형의 만남에서이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과 알력은 그들의 가시 돋친 대화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속에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암시가 작용한다.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이 이러한 문제들에 깊이 연관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상황의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참다운 소설이 언제나 인간적인 척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사실 그대로, 점묘되는 삽화처럼 그려지고 있는 지게꾼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정감 어리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