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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인훈 단편소설 『총독의 소리』

by 언덕에서 2024. 4. 19.

 

최인훈 단편소설 『총독의 소리』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이 지은 연작 단편소설로 모두 네 편의 작품으로 이어져 있는데, <총독의 소리 Ⅰ>과 <총독의 소리 Ⅱ>는 1967년에, <총독의 소리 Ⅲ>은 1968년에, <총독의 소리 Ⅳ>는 1976년에 각각 발표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연작 형식에서 중시하는 연작성의 요건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서사 문학의 기본적 요소인 행위 구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이야기 형태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첫 부분부터 가상 인물인 총독의 연설이 시작되는데, 어떤 다른 형태적 변경 없이 끝까지 이 형식이 유지되어 나간다. 가상의 인물인 총독의 모습은 일련의 연설(담화) 내용 속에 감춰져 있을 뿐 표면으로 도출되지 않고 있다. 즉, 인물의 행위가 없는 담화 상황 자체만으로 작품의 내적인 구조를 지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성의 규범을 뛰어넘는 형태적 파격은 문학의 인식 방법 자체에 대한 대단한 충격이다.

 

소설가 최인훈 ( 崔仁勳, &nbsp;1 936&sim;2018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반도(半島) 내에 남아 있는 정체불명의 유령 방송(조선 총독부 지하부 소속)을 통하여 반도 재점령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총독이 격려하는 담화를 발표한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제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의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총독의 소리’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광복 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식민지배의 상징이었던 총독이 여전히 반도(조선)에 남아 지하조직을 결성해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총독은 전쟁 전의 영광스럽던 제국으로 회귀할 것을 꿈꾸며, 조선을 다시 제국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현 시국 상황을 분석하고 기록한다. 총독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조선의 통일과 민주주의 확립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을 다시 식민지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이 발표되던 1967년에 있었던 한국의 선거과정을 지켜보면서 총독은 크게 기뻐한다. 금권 부정선거로 얼룩진 당시 선거가 말해주듯이 “역시나 조선인들은” 민주주의의 자유를 거추장스러워하며 오히려 제국의 식민지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의 발길질과 뺨 맞기, 바가야로와 센징을, 그 그리운 낱말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총독의 평가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양상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정치사회에 대한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를 묵묵히 듣고 있는 청취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담화 내용인즉, 반도인(半島人)의 어리석음과 무기력한 면을 지적하면서 형제들에게 반도 재점령을 위해 좀 더 자숙하고 힘을 내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잔혹한 학살모습과 저항하는 시민들

 

  이 연작소설은 프랑스 알제리전선의 자매단체이며 한국의 지하비밀단체인 ‘조선총독부 지하부 소속 유령 해적방송’이라는 정체불명의 유령방송의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 이 연작 단편들은 1960년대에 있었던 한일국교정상화 파동에 대한 반응으로 쓰인 것으로, 일제의 식민지적 상황을 당시의 이른바 신식민지적 현실과 대치시킨 일종의 풍자소설이다. 이른바 적의 입을 빌려 우리를 깨우치는 빙적리아(憑敵利我)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半島)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밀정과 낭인(浪人)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이 단편들은 그 연설에 적합한 풍속적 의상, 즉 총독의 옷을 입고 있다.

 총독의 눈에 비친 상황을 보여주고 이를 다시 부정하는 비판적 독백이 말미에 붙어 있다. 일종의 정치소설인 이 연작 단편은 <주석(主席)의 소리>와 같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당시의 작가의 불안의식을 정치적 차원에 회귀시킨 것이다. 이는 개항-식민지상황-분단에 이르는 한국근대사의 사건들을 주변문화국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였던 기왕의 방법들이 더욱 과격하고도 직설적인 문체에 의하여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 최인훈은 이 작품을 통해 두 가지 차원에서 기성 인습에 도전하고 있다.

 그 하나는, 문학적 인습에 대한 도전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적 인습에 대한 도전이란, 보편적인 사사 양식에서 벗어난 담화 양식을 통하여 새로운 소설 형식을 형성한 것이고, 정치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에 대한 도전이란, 당시 국내의 선거와 신식민지주의의 도래와 함께 매판성을 불러일으켰던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문제들을 반대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총독의 소리」의 문학적 성과를 정치적 효과로 집약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 일반화되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희화하고 전복하고 폭로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또, 이 작품에서 최인훈은 우리 시대의 언어가 아닌,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관점에 의한 살벌하고도 역겨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비극적 상황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