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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임선규 희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by 언덕에서 2024. 4. 27.

 

 

임선규 희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임선규(林仙圭)가 쓴 4막 5장의 희곡으로 1936년 7월에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인 [동양극장]에서 <청춘좌>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후 1938년 1월 설날에 [부민관]에서 전·후편이 공연되었다. 상연된 첫날부터 대만원을 이루어 광복 전 한국 연극사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홍도라는 기생 출신의 여성과 오빠인 철수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엮어지는 갈등구조에서 당시의 다양한 세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선악의 인물들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여 악인에 의한 착한 이의 수난을 다룬다. <홍도야 우지 마라>로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청춘좌(青春座)가 공연하여 장안의 화제를 모았으며, 동양극장의 주된 레퍼토리였다. 임선규는 박진ㆍ이서구ㆍ송영ㆍ김영수 등과 함께 동양극장의 전속극작가였는데, 이들은 관객층을 분석하고 연기자의 성격에 맞추어 쓸 것을 요청받았다. 특히, 동양극장의 주요 단골관객인 여성층과 기생층의 비위를 잘 맞추어 쓰는 것이 신파극의 성공을 결정지었다. 이 작품은 한 기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화류비련(花柳悲戀)의 멜로드라마이다. 이 작품은 1950년 말에 영화화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남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자라는데, 여동생 홍도는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해 기생이 된다. 홍도는 우연히 오빠의 동창생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명문가의 아들인 홍도의 애인은 명문인 박대감집 딸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홍도를 사랑한 나머지 동거생활에 들어가고, 그의 집안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완고한 그의 부모도 두 사람의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홍도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남편이 유학을 떠나자 시어머니는 기생며느리를 학대하고 내쫓음으로써 극적 전환을 맞는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음모를 꾸며 며느리를 부정한 여자로 만든다.

 그때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홍도는 순사가 된 자기 오빠와 함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시댁으로 간다. 그러나 음모자들인 시댁 식구와 오해한 남편은 그녀를 부정한 여자라고 박대하고, 남편은 전 약혼녀와 결혼하려고까지 한다. 너무 억울하고 분노가 치민 홍도는 순간 제정신을 잃고 전 약혼녀를 과도로 찔러 살인을 하기에 이른다. 그때서야 그녀의 결백이 밝혀지고 남편도 오해를 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순사인 오빠에 의해 손목에 수갑을 차고 끌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진다.

 

 

 이 작품은 봉건적 도덕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묘사한 전형적 신파극이며, 고등신파(高等新派)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동양극장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후반의 상업주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동양극장의 주요 단골관객인 여성층과 기생층의 비위에 잘 맞추어 쓰는 것이 신파극의 성공을 결정지었다. 이 작품은 한 기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화류비련(花柳悲戀)의 멜로드라마이다.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는 오빠의 친구인 광호를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데 시어머니의 멸시와 시누이 등의 음모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남편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된다. 절망의 끝에 몰린 홍도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편을 가로채려는 약혼녀에게 우발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순사가 된 오빠에게 끌려간다. 이 작품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서생인 월초인데, 그의 야비한 계략에 의해 비극이 시작되고 그의 고백에 의해 극중 사건이 해결되면서 결말을 맞는다.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인 '잘 짜인 극(well-made play)'으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예기치 않은 반전으로 주인공을 궁지에 빠뜨리고, 서스펜스로 관객들의 흥미를 고조시키다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주인공의 위기가 해소되며 논리적 해결에 이른다.

 당시에 '고등 신파극'이라고 불리기도 한 '한 많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은 당대의 가장 중요한 관객인 화류계 여성들의 처지를 대변하여 그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삶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과거를 문제 삼는 시어머니의 편견과 그녀 자신의 콤플렉스, 유학생과 경관이라는 중간계층과 기생과 하류계층 사이의 신분상의 장벽 등을 다루고 있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당시의 결혼 풍습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풍자하고 사랑보다는 지위·신분을 따지는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처한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고 그 시대의 배금주의적 세태를 고발하였다. 또한 홍도가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홍도의 순정을 깨닫게 하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봉건도덕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묘사한 전형적 신파극이며, 고등신파(高等新派)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동양극장]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후반의 상업주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극작가 임선규(林仙圭. 1912∼1970?)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관동리에서 빈농의 3남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명 임승복(林勝福), 필명 임선규(林仙圭), 개명한 이름은 임중랑(林中郞)이다. 빈곤한 가운데 서당에 다니다가 논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1927년 공립 강경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1931년 학비 조달이 어려워 중퇴했다. 그는 강경상고 재학 시절 조선연극사의 순회공연을 보았는데, 이때 강홍식의 연기에 빠져서 연극에 뜻을 품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강홍식을 찾아갔고,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의 연구생 배우가 되었다. 희곡 습작을 해왔던 그는 1932년, 번안극 <콘라도야 잘 있거라>(3막)를 제일극장에서 공연함으로써 극작가로 데뷔를 하게 된다.

 이후 1932년에만 해도 희극 <차용증서>, 서양극 <침묵>, 비극 <장탄야곡(長嘆夜曲)>, <사의 승리> 등을 공연했다. 이중 내용이 알려졌거나 텍스트가 남아 있는 작품은 <사의 승리>가 유일하다. 그해 8월 그는 황철 등과 함께 [조선연극사의 정단원이 되었다. 이후 극단에 거의 매월 한 작품 정도 극본을 제공했는데, 1933년 중국 작품 <양자강의 범선>을 끝으로, 극단 [연극시장(演劇市場)]으로 소속을 옮겼다. [조선연극사]의 핵심단원이었던 배우 문수일이 조직한 [연극시장]에 합류한 것은 문수일의 딸인 문예봉(文藝峰: 여배우)과의 연애와 결혼 때문이었다.

 [연극시장]이 몇 년 안 가 해체되자, 그는 [협동신무대(協同新舞臺)], [황금좌(黃金座)], [희락좌(喜樂座)] 등 2류 대중극단들에 극본을 제공했는데, 여전히 무명작가에 가까운 처지로 폐결핵까지 걸려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1935년 [동양극장]이 건립되고 연중무휴의 공연을 하게 되자 그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936년에 그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제출했는데 처음에는 지배인 최독견과 연출가 박진에 의해 폐기되었다가 사장 홍순언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황철과 차홍녀가 주연한 이 연극이 크게 히트함으로써 그는 일약 [동양극장]을 대표하는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동양극장]의 전속 작가 시절 <수풍령(愁風嶺)>(1936), <유정무정>(1936), <유랑삼천리>(1938), <북두칠성>(1939) 등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대부분 큰 인기를 끌었다. <수풍령>의 경우 민족주의적 작품이라 하여 임석 경관에 의해 공연중지를 당하고 피검되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1937년 6월 일본으로 연극 유학을 떠나 [동보극장] 연수실에서 몇 달간 극작법을 배우기도 했는데, 이 과정은 뚜렷한 갈등구조와 복선, 클라이맥스가 있는 희곡 구성법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9년 9월 홍순언의 사망으로 [동양극장]의 사장이 바뀌자 황철, 차홍녀, 박진, 원우전 등과 극단 [아랑]을 창립했으며, 창립작으로 <청춘극장>(박진 연출)을 올렸다. 이후 <결혼조건>(1940), <바람 부는 시절>(1940) 등 멜로드라마, 또 송영과의 합작인 <김옥균>(1940), 최고의 인기작 <동학당>(1941) 같은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역사극을 발표했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빙화>(1942), <상아탑에서>(1944), <새벽길>(1945) 등의 친일극을 공연했다.

 해방이 되자 한동안 친일작가로 몰려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12월에야 극단 조선의 <그 여자의 반생>(1945)으로 극작을 재개했다. 좌익 진영의 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한 아내 문예봉(文藝峰)의 영향으로 그도 남로당 창당 때 <긴급동의>를 공연하면서 좌익 진영에 들어섰다. 1947년 백조악극단의 공연 <천국에서 맺은 사랑>을 마지막으로, 1948년 먼저 월북한 아내를 좇아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는 극작 활동을 못하고 폐결핵으로 요양 중 사망했다.

 그는 공연대본 100여 편을 집필했는데, 희극은 극소수이고 비극이 대다수이다. 극본이 온전히 전하는 작품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동학당> <빙화> <새벽길> 등 4편뿐이다. 부분 기생의 비련, 신분이나 계급이 다른 남녀의 애정 등, 비극적인 애정문제, 가부장제 하에서 일어나는 신분 혹은 계급 차이로 인한 갈등을 다루었다. 또한 시대극도 많이 발표했는데 소재가 현실이건 역사건 간에 멜로드라마라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으며, 잘 짜인 구성과 감정 과잉의 극작술로 서민 계층에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