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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흔적도 없는 사라짐이 아름답다

by 언덕에서 2024. 3. 2.

 

 

흔적도 없는 사라짐이 아름답다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계로록)》을 쓴 30대 후반부터 조금씩 주변을 정리해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얼마 전부터 사진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가족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미 상당한 양을 태웠지만 내 사진은 50장 정도 남겨둘 생각입니다. 언뜻 시시해 보여도 고령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변 정리입니다.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써온 육필 원고를 모두 태웠습니다. 문학관과 흉상 등에 집착하는 분이 간혹 있는데 그런 분을 볼 때마다 왜 저렇게 세상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살아서 무리해도 죽은 후에는 잊히기 마련입니다. 나만 해도 (관광지에서) 문학비 등이 시야를 가려 경치가 잘 안 보인다고 투덜거립니다. 문학관은 머잖아 틀림없이 적자 때문에 골칫거리가 되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불편을 안길 위험이 큽니다. 남편도 나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는 무엇 하나 바라는 게 없습니다. 좋게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도 없습니다. 육체의 사라짐과 더불어 나의 존재 전부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깨끗하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이 세상에 대한 죽은 자의 예의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어머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꽤 오랫동안 몸이 불편하셨는데 외출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곤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옷과 반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유품은 신발 두 켤레와 옷 두 벌이 고작입니다. 옷 두 벌은 내가 오키나와에서 사 온 전통 명주로 “이건 나중에 내가 입을 거니까 누구 주지 말아요.”라면서 어머니에게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8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다다미 여섯 장에 반 칸짜리 ☞반침, 조그마한 주방, 화장실이 붙어있는 별채에 장롱 하나만 두고 생활하셨습니다. 유품 정리에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연인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쯤에는 어머니 명의로 된 저금도 바닥이 났습니다.

 약간의 재산이라도 남겼다가는 재산 처리 때문에 유족이 힘겨워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자식을 위한 마지막 베풂입니다.

 유산 문제로 싸우는 것보다 비참한 광경은 없습니다. 유산이 적다고, 많다고 해서 옥신각신하는 세상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유언장이 의무처럼 느껴집니다. 자녀가 많은 집에서는 부모가 남긴 오시마쓰무기(大島紬, 아마미오섬의 전통 공예품으로 고급 견직물) 한 장 때문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큰딸, 이건 둘째딸, 하고 생전에 유품을 나눠주거나, 버리거나 혹은 팔아서 상속인 수에 맞게 현금을 나누는 등 화근의 싹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반침(半寢) : 큰 방에 딸린 조그만 방.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데에 쓴다.

 

 

- 소노 아야코 「노인이 되지 않는 법(리수) 153~5

 


☞소노 아야코(Ayako Sono ,その あやこ ,曾野 綾子 , 본명 : 三浦知壽子, 1931~) :  일본 소설가. 『멀리서 온 손님』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오르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평생 독신을 꿈꾸었지만 같은 문학 동인지 멤버였던 미우라 슈몬을 만나 22세의 나이에 결혼에 이른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치원 때부터 대학까지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외일본인선교사활동후원회]라는 NGO를 결성하여 감사관의 자격으로 전세계 100개 국 이상을 방문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1972년에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초장기 베스트셀러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계로록戒老錄)』을 비롯하여 다수의 소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