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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동하 단편소설 『모래』

by 언덕에서 2024. 5. 25.

 

 

이동하 단편소설 『모래』

 

 

이동하(1942~)의 단편소설로 1977년 발표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그해 [한국소설문학상]을 받았다.

 작가는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1945년 해방과 함께 고향인 경북 경산군 남천면 대동리에 돌아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야간부 고등학교 과정에 등록해 일반 학생들보다 몇 년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7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했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어려서 겪은 개인적인 고난사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들을 내세워 일상성 속에 함몰된 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자의식을 그려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경향은 전쟁 난민의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연작 중편집 <장난감 도시>(1982)와 세상의 온갖 폭력에 대해 탐구한 창작집 <폭력 연구>(1987), 1980년대의 정치적 폭력과 공권력의 기만성을 폭로한 장편소설 <냉혹한 혀>(1995)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 날. 7시도 되기 전에 출근한 열 다섯 살 사환 영희가 굳게 잠긴 회사의 철문 앞에서 어리둥절해한다.

 “당분간 일체의 조업을 중단하고 휴무함. 사장백”이라는 종이쪽지가 녹슨 철제대문 위에 붙어 있다. 걸어잠근 문 앞에서 수위장은 조업도 중단됐고 일체의 출입도 금하니 돌아가라고 말한다.

 콧구멍만한 공장도 아니고, 나름 총무과 경리과도 있고 영업과 등 조직도 분명하고, 부사장도 있고 전무도 있고 부장들도 여러 명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이다.

 어제까지도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갔던 회사였기에, 더군다나 사장이 업무차 홍콩에 출장중인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에 아무 것도 모르는 직원들은 황당해한다. 수주량이 많은 성수기에 조업을 중단하고 휴업을 할 정도라면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때는 1970년대 중반. 일자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들을 부양할 방법이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다방에 모여 상황을 파악해보기 위해 애써보지만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부사장이나 전무 등 중역들은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는다. 부장 등 중간계층의 간부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은인자중 몸조심만 하고 있다. 직원들 사이엔 깊은 절망감만 묵직하게 맴돌 뿐이다.

 몇 일 후 사장이 귀국하자 사정이 밝혀진다. 외유중이던 사장은 집으로도 국제전화를 할 새가 없이 바빴고, 겨우 틈을 내어 회사로 전화를 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숙직사령이었던 비서는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수위장이 전화를 받았다.

 어물어물 통화를 끝낸 수위장이 이튿날 메모해두었던 통화 내용을 비서에게 전했다.

 ‘내가 귀국할 때까지 모든 일을 중지할 것. 사장.’

 이것이 ‘일체의 조업을 중단하고 휴무함’이란 어처구니없는 공고문의 연원이었고, ‘일체의 출입을 금함’이라는 말은 수위장의 보너스 덧붙임 말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재미난 영화나 콩트처럼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 셈인데 크게 흥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씁쓸하다. 그 이유는 뭘까?

 첫째, 공업화 도시화에 따라 도시로 몰려든 서민들의 삶의 기초가 너무 허약하기 때문이다. 평생 일터로 알고 다니던 직장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직원들로 표현되는 근로자들의 삶의 터전이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너무나 허술하다. 헌법에 보장된 근로3권이 법률로 구체화되고, 작은 도시까지 근로감독관들이 배치되어 근로자들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는 작금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엠에프 사태와 90년대말 모기지론 사태에서 보았듯이 현실의 경제구조 역시 ‘모래’위에 지은 성처럼 허술하기 그지없어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소통 부족의 문제는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도 일상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사장이 아무리 외국 출장중이라고 하더라도 부사장이나 전무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왜 공사 문까지 닫고 직원들 출근들까지 하지 못하게 한 것인지 확인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연락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사장의 지시라고 하니 무조건 따랐을 뿐이다. 사장에게 잘못 물어보았다가 찍힐까봐, 잘못했다가는 밉보일까봐, 나는 찍히지 않아야겠다고 눈치만 보는 중간층들은 가엽기까지하다.

 사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일인회사 뿐 아니라 한사람에게 힘과 권력이 집중된 조직, 국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말이라고 하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맹종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지금도 도처에 많다.

 이 작품에 대해 평을 쓴 황석영 작가는,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근로자의 임금을 떼어먹는 저주받을 기업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근로자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급여를 생색내며 주는 기업의 대표들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다. 근로자의 고용불안을 교묘히 이용하는 치사함이라 생각한다. 실업의 불안을 실감 나게 다룬 단편이다. 회사 문을 잠시 닫았던 이유가 어처구니없다. 닫힌 철문을 보고 우왕좌왕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실감 났고 그들이 불안은 곧 근로자로 사는 나의 불안이기도 하기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기업이 철저하게 ‘이익’에 집중하긴 하지만, 예전엔 평생직장이고 기업에도 어느 정도의 인간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성과 위주의 노동환경이 주는 압박과 비정규직이란 고용불안으로 노동의 안정감을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 속의 풍자가 강하게 다가왔다. (중략)이 짧은 소설은 근대화가 진행 중인 우리 사회 생존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또한 어떻게 기만적인지를 풍자적으로 드러낸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