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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조해일 단편소설 『매일 죽는 사람』

by 언덕에서 2024. 3. 11.

 

 

조해일 단편소설 『매일 죽는 사람』

 

 

조해일(趙海一. 1941∼ )의 단편소설로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조해일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작가는 75년 [중앙일보] 연재소설 <겨울여자>는 수십만 부 판매를 기록,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는 70년대초까지는 작가의 상상적 세계였던 가정 파괴범에 의해 순박한 신혼생활이 산산조각난 <무쇠탈> 연작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시대에 만연된 폭력의 정체를 우회적으로 밝히려 했으며, 80년대에는 눈에 보이는 뻔한 폭압적 상황에서 감추면서 이야기하는 우화적 수법 에 염증을 느끼고 글쓰기의 중노동에서 벗어나 문단과 담을 쌓고 교수생활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운명을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제목부터 의문스럽다. 첫 문장을 읽으면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는 이 사람은 어떻게 매일 죽는다는 것일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그는 주로 죽는 역할을 맡는 단역배우이다. 그로 인해 주인공은 자신이 점차 죽어가는 중이라고 느끼며, 죽는 연기와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1980년 이원세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인 그는 언제나 들러리에 불과하다. 스타의 한 칼에 무수히 죽고, 무수히 쓰러지는 들러리이다. 그에게는 각본대로 짜여진 한 도막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의 배역 이외에는 어떤 연기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왜냐 하면, 그의 삶의 현장이 바로 그 영화 장면의 한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음미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세상의 모든 편리한 방식,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모든 편리한 규범에 지쳐 버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밟아 온 길을 돌아보거나, 또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퍼스펙티브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결말이 나거나 최종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 다리가 경직되기라도 한 듯, 뻣뻣하고 불편했으나, 그는 안간힘을 다 써서 걸었다. 골목의 가게들은 아직도 불을 켜 놓은 채0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죽은 사람을 전송하기 위한 장의(葬儀)의 불빛처럼 보였다.

 어느 나라에서는 맨발은 바로 입관식 전의 사자(死者)를 뜻한다던가? 그는 생각했다. 하긴 어디 나만이 죽는 것이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커다란 소멸의 흐름 속에 던져진 채 있다. 시간까지도. 누구나 매일매일 조금씩은 죽어 가면서 살고 있다.

 

소설가 조해일 ( 趙海一 . 1941 &sim;&nbsp; )

 

 이 소설은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선택도 부여받지 못한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인 ‘그’는 언제나 들러리에 불과하다. 스타의 한 칼에 무수히 죽고, 무수히 쓰러지는 들러리이다. ‘그’에게는 각본대로 짜여진 한 토막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의 배역 이외에 ‘그’에게는 어떤 연기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현장이 바로 그 영화 장면의 한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음미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세상의 모든 편리한 방식,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모든 편리한 규범에 지쳐 버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밟아 온 길을 돌아보거나 또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전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결말이 나거나 최종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 다리가 경직이라도 일으킨 듯, 뻣뻣하고 불편했으나 그는 안간힘을 써서 걸었다. 골목의 가게들은 아직도 불을 켜 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죽은 사람을 전송하기 위한 장의의 불빛처럼 보였다. 어느 나라에서는, 맨발은 바로 입관식 전의 사자(死者)를 뜻한다던가? 그는 생각했다. 하긴, 어디 나만이 죽는 것이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커다란 소멸의 흐름 속에 던져진 채 있다. 시간까지도…….누구나 매일매일 조금씩은 죽어 가면서 살고 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용의 맨 끝 구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자신의 삶의 어떤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작가의 소박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이란 구체적인 경험의 순간들 속에서 그 자체가 성취된다. 소설도 그와 같아서 순간들의 창조 속에서 그 자체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아주 포괄적인 형식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인간의 모든 다양성을 위한 여백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소설이 의미 있는 인간 경험의 총체적인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는 『매일 죽는 사람』에서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도덕적 생활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이 소설은 인간의 고뇌의 크기를 완벽하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대한 정리된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의 현실적 상황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활 방식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서는 흔히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 소설의 결말에서 인생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결심을 '그'를 통해 보여 주려고 한 것은, 하나의 사족과도 같은 것이긴 하지만, 소설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작가의 비전에 해당하는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