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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청준 단편소설 『소리의 빛』

by 언덕에서 2024. 3. 13.

 

이청준 단편소설 『소리의 빛』

 

 

이청준(李淸俊.1939∼2008)의 단편소설로 1992년 발표된 단편 <서편제>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연작소설집 <남도사람>에 수록된 단편소설로 한(恨)과 소리, 억압과 예술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청준은 후에 소설집 제목을 <서편제>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내용은 단편 <서편제>에서 등장했던 두 주인공 의붓 남매(이부동복異父同腹 남매)가 전라도 산골 주막집에서 재회하고 밤새 소리판을 벌인다. 그리고 서로 오누이임을 알면서도 소리로만 교감을 나누고 말없이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남도사람>은 다섯 편의 연작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⓵서편제, ⓶소리의 빛, ⓷선학동나그네, ⓸새와 나무, ⓹다시 태어나는 말 등이다. 각각 길지않은 소설들이고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 영화 <서편제>의 원작은 1편 <서편제>와 2편 『소리의 빛』 일부분이다. 3편 <선학동 나그네>는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2007년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서 <천년학>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단편소설『소리의 빛』의 구성은 <서편제>에 비해서는 단순하지만, 원한이 한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리움이 한이 되어가는 모습이 구슬프게 묘사된다.

 1970년대에 발표된 <서편제>는 엄밀하게 말하면 현대문학에 속한다. 통상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가르는 기준은 19세기 전후다. 하지만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인 ‘한’과 한국의 고전 공연예술 판소리를 전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의 주요 소설로 자리매김했다. '서편제'는 판소리 유파 중 하나로, 구성지고 애절한 가락이 특징이다. 동편제도, 중고제도 아닌 서편제를 택한 건 작가의 배경과 관련이 있다. 서편제의 주요 활동 지역은 이청준 작가의 고향인 전남 장흥과 그 인근 보성 일대다. 판소리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이 작가는 늦둥이 딸을 위해 판소리 동화를 쓰기도 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장흥읍을 10여 리쯤 남겨놓은 섬진강 물굽이를 끼고 물가 가까운 곳에 주막집이 있다.

 이러한 궁벽한 주막집에 주막집 주인 천씨와 주방일을 맡아 주모 격으로 일하는 아니 서른쯤 되어보이는 앞못보는 장님 색시가 있었다. 이 장님 색시는 놀랍도록 구성진 남도소리를 부를 때가 종종 있었는데 임자년(1972년) 늦가을 저녁 무렵 서울에서 한약재 수집을 하러 전국을 떠돌던 외지 손님 하나가 이 주막을 찾게 된다. 주막에서 술을 먹던이 사내는 날이저물자 장님인 여인에게 뜻 밖의 주문으로 소리를 부탁하게 되고 사내의 거듭되는 간청에 옷을 정갈히 갈아입고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장님 여인은 '호남가'로 시작하여 ,'편시춘'을 이어부르며 점점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 소리를 하고 이 소리에 사내의 얼굴에는 차츰 어떤 고통의 빛이 어리게 된다.

 소리를 마친 후 장님 여인이 사내에게 소리를 좋아하게 된 내력을 묻자 사내가 그간의 내력을 말하게 되고 사내와 장님 여인은 새벽녘 동이 틀 무렵에야 소리를 끝낸 후 여인의 방에서 함께 잠자리에 들게 되고 날이 밝았을 때 사내는 말도 없이 주막을 떠나게 된다. 이후 늦게 일어난 장님 여인이 주막주인 천씨에게 간밤의 손님이 자신의 오라비였음을 밝히며 옛일을 털어 놓는다. 소리꾼인 여인의 아비는 사내의 의붓아버지였으며 어머니가 여인을 낳고 죽자 나이어린 오누이를 데리고 소리로 끼니를 빌고 떠돌아 다녔다 소리꾼 아비는 여인에게 소리를 하게 했고 끝내 소리를 하지 않으려 했던 오라비에게는 북장단을 익히게 했다. 하지만 그 오라비는 어느해 가을 소리꾼 아비와 여인을 떠나 영영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이후 소리꾼인 아버지는 딸마저 도망칠까봐 딸(여인)의 눈을 멀게 만들고 이를 안 여인은 가슴 속 한이 소리로 구성지게 흘러나와 소리로 구걸 유랑을하며 아비와 떠돌게 되었다. 소리꾼이 아비가 나이가 들어 돌아가시기 전에 여인에게 자신이 늘 소리를 할 때 오라비의 눈에 살기가 도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아마도 오라비가 그간 의붓아비를 따라 다닌 것은 의붓아비가 자신의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여인을 낳고 죽게되자 의붓아비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들은 주막 주인 천씨는 아마 사내가 그렇게 말없이 떠난 것은 여인의 한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 틀림 없다며 사내(오라비)가 다시 찾아 올거라 위로의 말을 해준다. 여자의 눈에는 물기가 맺혀 흐르고 소리로써 자신의한을 구성지게 풀어내게 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인 여동생이 주막집 주방에서 일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던 중 우연히 그 곳에 나타난 오래비는 자신이 오래비임을 밝히지 않은채 그녀에게 소리를 청한 다음 자신이 북장단을 들고 밤새도록 소리판을 벌인다. 새벽까지 소리를 한 뒤 그들은 함께 잠을 청하고 새벽에 다시 헤어진다.

 

 작품의 제목인 '소리의 빛'은 상징하는 바와 같이 만날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빛과 같은 무엇이다. 밤새 반짝이던 빛이지만 오간데 없이 흘러가버리고 날아가버린 소리의 모습만 남아 있다. 이는 곧 허무함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허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한의 예술적 승화라는 차원으로 끌어올려진다. 작품 속의 두 남매가 서로의 모습도 확인하지 못하고 소리로 한데 어우러져 서로의 마음을 나눈 것은 한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서편제>는 다섯 편으로 이뤄진 연작소설 중 일부다. 이청준 작가는 1976년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 단편소설 <서편제>를 발표한 이후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 등 이어지는 소설을 썼다. 연작소설 다섯 편은 <남도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위에 열거한 단편소설은 한 편씩 읽어도 좋지만, 같이 읽으면 깊이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소리의 빛」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느 주막에서 재회한 소리꾼 남매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바로 서로를 알아챘지만, 한마디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자네가 살아온 반생의 내력도 자네 한을 보면 저절로 다 알아볼 수가 있다”며 밤새 소리만 나눈다. 날이 밝도록 누이의 노래에 북장단을 맞추던 오라비는 인사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단편소설 「소리의 빛」은 인물의 내면을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수묵화 같다. 임권택 감독은 다섯 편 중에서 <서편제>와 「소리의 빛」 두 편을 재구성해 영화 [서편제]를 만들었다. 연작소설 중 <선학동 나그네>도 이후 임권택 감독이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