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단편소설 『가실(嘉實)』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단편소설로 1923년 2월 12일∼23일 사이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삼국유사> 열전 제8편 ‘설씨녀’에서 제재를 취하고 있으며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광수는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 위반 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 <가실(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ㆍ송진우의 권고로 [동아일보] 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다.
이 작품은 이광수 특유의 계몽적 목소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성실성과 신의를 강조하는 것이 주제가 된다. 동족 간의 싸움을 극복하는 가실의 인간적 신의와 그에 걸맞은 노력이 설 씨녀와의 사랑을 완성하려는 집요함과 한데 어울리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이루려던 시절, 설 씨녀의 아버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가난한 농부였다. 나라의 수자리(변방을 지키는 병역의 노역)에 징발된 설 씨 노인은 어린 딸을 데려갈 수도 없는 딱한 처지에 빠졌다.
그는 집을 찾아온 청년 가실에게, 어릴 적 병으로 죽은 어미와 전장에 나가 죽은 오라비들 이야기를 하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설 씨녀를 아내로 삼고 가산을 맡아달라고 완곡하게 당부한다.
다음날 수자리 행렬이 떠날 때 가실은 설 씨 노인에게 자기가 대신 수자리를 가겠다고 자청한다. 떠나는 가실에게 설씨녀는 감사의 말과 혼약에 대한 정절을 다짐하였다.
수자리를 떠난 가실은 고구려와의 끝없는 싸움으로 3년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새로 오는 군사들로부터 노인의 건강이 여전하고, 그 딸이 아직 시집가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하나, 어쩔 도리가 없는 가실은 3년째 되는 어느 날, 고구려 군사와의 싸움에서 그만 포로가 되고 만다.
포로가 된 가실은 고구려 땅에서 종으로 팔려 어떤 늙은 농부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처음에는 갖은 모욕과 욕설을 듣던 가실이 신라 사람이라 논농사도 잘 짓고 해서 동네 사람 모두가 가실을 청해 농사짓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매년 가을이 되면 가실은 주인에게 놓아주기를 청했으나, 주인은 완력만이 아니라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그를 본국에 돌아가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핑계삼아 자신의 사위로 삼으려는 뜻을 갖게 된다. 하지만, 변함없는 가실의 마음에 탄복한 주인은 드디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이튿날 가실은 주인 내외와 딸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그곳을 떠났다. 주인 내외는 설 씨녀가 혼인했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당부하면서 그를 떠나보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우리나라로 나는 돌아간다.”
고 외치면서 지팡이를 드던지면서 동으로, 동으로 고국을 향해 걸었다.
이 작품은 1923년의 발표이기 때문에 그의 초반 정년기의 패기 있는 젊은 사상이 내게는 큰 매력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작품을 높이 보는 것은 그런 단순한 조건에서만은 아니다. 작품적으로 춘원소설에서 성공한 상위(上位)의 작(作)이요, 또 우리 단편소설사(短篇小說史)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분명히 초기를 대표한 가작(佳作)이라고 본다.
나는 위에서 춘원 작품은 일반적으로 극적인 요소가 약하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이 <가실(嘉實)>에서는 충분히 그 극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춘원은 근대적인 신문학을 개척하고 건설한 작가이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근대 리얼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문장도 묘사보다는 서술(敍述)이 승하고, 작품 조건으로서도 인물 사건에서보다는 이야기 운반에 더 세력을 두고 있다고 보는데, 이 작품은 그 스토리에 전환적인 굴곡이 크고 비교적 사건도 복잡하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 그 사건들이 생생하게 약동하듯 전개되어 간 문맥(文脈)의 최조(快調)이다, - 백철(白鐵) : <한국단편문학대계>(1969) 발췌 -
♣
단편소설 「가실」의 인물 구성은, 그가 표나게 성실성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작품은 이광수가 상해임시정부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서 국내로 들어온 다음, 약 1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익명작(匿名作)으로, 자신의 환국에 대한 일종의 자기변명의 의도가 담긴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작품에 나타난 특성은 현실을 관망한 이후 개인의 문제로 전환하는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며, 현실의 당면 문제보다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 버린 도피적 심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자기변명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실」의 문학사적 의의는 이광수 문학의 계몽적 요소가 그 사회성으로부터 역사 속에 담긴 지순한 사랑의 문제로 옮아가는 가교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 자전적 요소로부터 벗어나 허구적 세계의 구축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백철은 이 작품을 인도주의적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 작품이 고구려와 신라간의 전쟁 속에서도 서로 같은 인간이며, 민족임을 확인하는 대목을 꼽으면서 자신의 휴머니즘적 평가와 연결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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