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장편소설 『회색인(恢色人)』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의 장편소설로 1963년 6월부터 1964년 6월에 걸쳐 [세대]지에 연재 발표되었다. 연재 당시의 제목은 '회색의 의자'였다. 전체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평론가 이보영에 의하면 최인훈 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인 계몽적 관념은 「회색인」에 와서 전면에 노출된다. 여기에는 <광장>의 원숙한 구성도 없고, 배경은 단조롭고 인물이나 사건은 거의가 관념을 유도하고는 그 관념들 속에 해소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회색인」의 주인공은 독고준이라기보다 그의 관념이다, 이런 사정은 <서유기>와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소설문학의 가장 큰 약점의 하나는 관념소설의 빈곤이다. 양적으로도 아주 적지만, 그나마 대부분의 관념소설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주인공은 지적 우월감 때문에 부질없이 관념과잉으로 흘러 영리한 바보가 되어 있다. 최인훈은 이런 뜻에서 한국문학의 맹점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용감하게 관념의 영역으로 뛰어든 서구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성패는 앞으로 나올 관념소설가에게 귀중한 교훈이다. 관념의 생명력은 도식이 아니라 회의를, 계몽이 아니라 대타관계(對他關係)에서의 부단한 자기 부정을 통한 발전을, 야유보다는 미지의 것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놀람을 통하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다고 이보영은 지적하고 있다.
이 소설은 불안과 소외의식으로 고뇌하는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그린다. 장편소설 「회색인」은 최인훈의 소설 속에서 ‘사건’이 점차적으로 퇴조하고, 에세이 스타일의 지적 독백이 강화되는 경향의 서두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통과 의례 규정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어떤 원시인 젊은이의 공방(空房)의 기록이다”고 설명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58년, 비 내리는 어느 가을 저녁에 독고 준의 하숙집으로 친구인 김학이 찾아오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학술 동인잡지 [갇힌 세대]에 실린 독고 준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정치학과에 다니는 김학은 국문학도이면서 소설을 쓰는 독고 준에게 그들의 동인회 '갇힌 세대'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다. 낯선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서 삶의 뿌리를 뽑힌 채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독고 준은 모든 일에 소극적이며 회의적이다. 전쟁의 와중에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독고 준은 월남해서 함께 살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의지할 곳 없는 혈혈단신의 고학생이다.
친구 김학과는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절친한 사이지만 그가 권하는 정치학도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를 꺼려한다. 독고 준이 현실변혁에 대해 회의적인 인물이라면, 김학은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행동주의자에 가깝다. 김학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독고 준은 김학이 돌아가고 나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회상과 상상이 뒤섞인 관념의 여행을 떠난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집과 과수원, 부서진 학교, 월남한 아버지, 영문도 모르고 지도원 선생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자신, 자신을 버리고 월남한 남편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누이의 모습 등 자신의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되는 회상과 상상의 여행 속에서 독고 준은 이데올로기(현실)로부터 소외되었던 지난날의 자신과 지금도 역시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고학생으로서 생활의 어려움을 겪던 독고 준은 월남할 때 가져온 가방 속에서 한때 매형이었던 현호성의 당원증을 발견한다. 월남 후 곧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민 현호성은 공산당원이었던 과거를 숨기고 자유당의 당원으로 맹활약 중이다.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생활고에 쫓기던 독고 준은 당원증을 빌미로 그와 은밀한 거래를 한다. 그리하여 현호성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고, 그곳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현호성의 처제인 이유정을 만난다.
한때 독고 준은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사랑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김순임이라는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왠지 자신의 불순한 동기를 반성하게 하는 순결한 느낌의 김순임과는 달리 이지적이면서 자기주장이 강한 이유정에게로 점점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고 준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상념의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비겁함과 소심함에 끊임없이 갈등한다.
1959년,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저녁, 친구 김학이 독고 준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끝에 김순임의 이야기가 나와 일순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김학은 돌아간다. 친구를 보내고 난 독고 준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아래층에 있는 이유정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진다.
장편소설 「회색인」은 최인훈의 소설 속에서 지적 독백과 사변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표 작품 중 하나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두고 “통과의례 규정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어떤 원시인 젊은이의 공방(空房)의 기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광장>,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의 작품들과 더불어 작가의 자전적 색채와 작품 세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대개의 작품들이 그렇듯 「회색인」 역시 한국사회의 모순와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지적이며 비판적인 성찰을 담아낸다. 특히 이 작품은 인물들의 관념적 사고와 논리적 사변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의 젊은이들이 겪는 갈등과 고뇌, 가치관과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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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은 작가 특유의 관념적 경향이 엿보이는 에세이 스타일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 초기 작품으로서, 소설의 형식 자체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실험적 소설이다. 4ㆍ19혁명 직전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자유당정권으로부터 제3공화국으로 이동해가는 정치사적 분기점에서 역사적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독고 준이라는 청년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분단현실과 민족주의 등 한국사회의 집단적 모순을 중심테마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사고의 추이를 주시하고 논리와 사색적인 진술이 많은 일종의 관념소설이다. 특히 실험성으로 대표되는 소설의 새로운 서술양식과 주인공이 운명의 굴레를 지성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한 점에서 한국 지식인의 전범을 처음으로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인훈 자신이 자인했듯이 <총독의 소리> 등과 같이 어느 정도 소설 형식 자체를 초월한 듯한 이 작품은, 대체로 그의 작품은 경직화된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후 사회의 이원화된 논리에 대한 반감의 작품이기보다는 사고와 관념에 의해서 유리되는 집단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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