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단편소설 『저녁의 구애』
편혜영(片惠英, 1972~)의 단편소설로 2011년 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같은 해 발간된 동명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심사위원회는 “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플로베르적 절제로 최대의 소설적 경제를 이끌어냈다"면서 "현대사회의 익명성과 인간 소외에 대한 고발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만의 시각과 어조로 그 주제를 완전히 환골탈태하였다"라고 평했다. 또 "독자는 어느새 재앙의 주체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동시에 새 삶을 찾을 주체도 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서 "그러니 그의 소설은 저주가 아니라 모험으로의 초대"라고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작가는 도시 문명 속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감춰진 불안과 고독, 황폐한 내면을 꿰뚫으면서, 편리하고 안온한 일상이 소름 끼치는 불안과 암흑 그리고 끝 모를 공포로 탈바꿈해 가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시종일관 감정의 절제를 잃지 않고 지독하리만큼의 정교하고 탄탄한 문체로 지금껏 너무도 익숙해서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았던 도시 일상을 속속들이 묘파해가는 편혜영의 소설들은, 견고한 기계문명과 첨단 설비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예외성과 일탈을 거부당하고(마치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처럼), 위생과 편의, 지극한 도락으로 포장된 도시 문명이 정작 인간을 非정서화, 非문명화, 新야만의 세계로 몰고 가는 주범임을 고발하는 듯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그’는 언제나 똑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8시 38분에 오는 기차를 타고 복사실로 출근한다. 인문관 구내식당에서 정식 A세트를 시켜 먹고 다시 복사실로 돌아와 일을 한다. 학생들이 잘 오지 않는 시간에는 영화를 보거나, 학생들에게 팔리지 않아 남은 교재들을 읽는다. 버튼 하나를 누르기만 하면 쉴 새 없이 일하는 복사기처럼 ‘그’는 늘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도중 그의 무료한 일상을 깨는 사건이 발생한다. 언제나와 같이 8시 38분 기차를 기다리던 ‘그’는 한 사내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와 순간 눈이 마주쳤던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떨어뜨리고 선로 위로 몸을 던진다.
‘그’는 참조인으로 조사에 참여해 달라는 경찰에게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거짓말을 치고 도망친다. 처음으로 기차를 놓치고, 평소와는 달리 택시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사내의 죽음을 모른 체했다는 사실에 ‘그’는 하루 종일 죄책감에 시달린다.
부모님의 허무한 죽음을 떠올리며, 사내를 위한 시간을 조금도 내주지 않았던 자신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그’가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객사, 어머니의 예견되지 않았던 교통사고를 겪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워진 일상에 적응하는 동안 고통을 느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시작하게 된 복사실에서의 일상은 ‘그’가 ‘그’ 자신을 흉측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는 살이 오른 자신의 육체와 자라난 털들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가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는 복사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 습관처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1001편의 영화’를 시청했다. 그는 힘겹게 적응하게 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루하루를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증이 오늘의 사건을 만들게 되었다. 오늘의 시간에는 ‘그’의 위태로웠던 일상을 단 번에 깨뜨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가 피하고자 했던 죽음이 ‘그’ 앞에서 일어난다. 안전한 하루를 지키기 위해, ‘그’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려 하지만 불가능하다. 경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은 이미 자살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는 ‘그’가 사건의 참조인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는 경찰서에 찾아간다. 오늘이 찾아오기 이전까지 ‘그’ 안에 축적되었던 불안감과 ‘그’의 성격 형성을 이루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한 사내의 죽음을 통해 터지게 된 것이다.
♣
버튼을 잘못 눌러, 원래 하려던 것과 다르게 작동시켜도 복사기는 돌아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 채로 돌아가며 기계로서의 본분을 다 한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이상할 만큼 자신의 일상에 집착한다. 그렇게 해서 유지하게 된 무료한 일상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그’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낀다. ‘그’도 알게 모르게 ‘그’가 느끼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심화되어 간다. 이 일상이 잘못된 것이더라도 ‘그’는 복사기(기계)처럼 하루하루를 반복한다. 기계 속이 사람 속보다 쉽다는 어머니와 이모의 말씀처럼, 고장 난 복사기는 고쳐졌다. 하지만 균열이 생겨버린 ‘그’의 일상은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하게 분절된 시간표를 지키며, 동일한 식사를 하고, 동일한 의복을 입고, 동일한 독서를 하고, 동일한 교통수단으로 출퇴근하는 삶, 그래서 어떤 차이도 없고, 차이가 없으니 상처도 없고, 그래서 어떤 굴곡도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전히 동일해지는 나날의 연속, 그것은 ‘삶의 복사’다. 동일하고 동일하고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의 저 군상들, 그들이 사는 곳은 바로 그 이유로 미로이고 저수지이다. 야만이 문명이고 문명이 야만이다. 『저녁의 구애』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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