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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황순원 장편소설 『일월(日月)』

by 언덕에서 2024. 6. 11.

 

황순원 장편소설 『일월(日月)』

 

황순원(黃順元, 1915∼2000)의 장편소설로 1962년부터 [현대문학]지에 3부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1966년에 [3ㆍ1문화상]을 받고 영화화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첫머리가 [현대문학]지에 실린 것은 1962년 1월(85호)이었고 끝부분이 실린 것은 1965년 1월(121호)이었다.

 황순원은 숭실중학 재학 때 <시나의 꿈> <아들아 무서워 말라> 등을 발표하여 무단에 데뷔한 이후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으로 처음에는 시를 써 시집을 낸 일도 있었으나, 1940년 무렵부터 소설로 전향하였다. 다른 작가와는 달리 오직 창작에만 전념하는 작가로 문학에 대한 진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성의 치밀성, 문장의 시적 세련, 높은 예술적 품격 등은 한마디로 예술주의 또는 예도주의(藝道主義)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단편과 장편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백정 출신의 신흥 부자 상진영감 일가족의 몰락 과정을 그리면서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비극적 요소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인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와 비슷한 인물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하는 주인공 인철은 장래가 촉망되는 건축공학도이다. ‘인철’은 대천 해수욕장에 갔다가 은행장의 딸인 ‘나미’를 알게 된다. 인철은 대학원에서 학위논문 준비중에 있으며, 근래에 사귀기 시작하여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져가고 있는 나미의 아버지로부터 건축설계를 의뢰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울에 돌아와서도 자주 만나고, 인철은 나미네의 새로 짓는 집 설계를 맡는다.

 그러한 인철이 어느날 자기가 백정의 후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사실은 그의 이제까지의 삶의 바탕을 근원적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한다. 인철은 그것을 나미에게 끝내 고백하고 만다.

 어렸을 때 부터 소꼽친구요, 상기도 누나처럼 다사롭게 감싸주는 다혜와 만나도 예전 같은 마음 편안함을 의식할 수 없고, 구김살 없는 정열로써 접근해오는 나미에게도 전처럼 대할 수가 없다. 누구와의 만남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완강한 외로움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기 시작한다.

 인철의 아버지와 나미의 아버지는 금전 거래가 있는 사이였다. 나미의 아버지는 인철네의 내력을 알게 되자 거래를 거부한다.  나미네 새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 날 밤, 인철은 점점 소외감을 짙게 느끼게 된다. 인철은 대폿집에 들러 술친구들과 어울려보기도 하나 그의 방황은 더해만 간다. 한편, 이제까지 자기위장으로 살아왔던 인철의 아버지는 사업의 치명적 실패로 끝내 나미 아버지에게서 융자를 못 얻어 파산하기에 이르른 인철 아버지는 자살하고 만다. 남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보람없이 살아오던 어머니는 아예 기도원으로 옮겨가버리고, 누이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불구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시련 끝에 인철은 다시금 자아를 바로 세울 수 있게 되고, 사촌형인 기룡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기 고독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고독을 딛고 일어서려는 삶의 의지를 다진다.  

영화 [일월], 1967년

 

 주인공 ‘인철’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자기가 백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부터 그 병이 싹텄다. 그의 방황은 여기서 시작된다. 물론 그에게는 누이 같은 살가운 이해로서 감싸주는 ‘다혜’가 있고, 깜찍하고 구김 없는 애정으로 접근해 오는 ‘나미’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이해나 애정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는 이제 없게 되었다. 그들과 언제나 관찰자로 머물게 하는 또 하나의 시선. ‘자의식’이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자기 위장 속에 숨어버릴 수도 없고. 어머니처럼 종교라는 이름의 행복한 착각 속으로 도피할 수도 없다.

 그가 줄곧 ‘기룡’을 찾는 것은, 그를 통해 이제껏 허위의 그늘에 가리워 있었던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함이다. 그것으로 말하자면, 허위나 과장 없이 자기 자신의 숙명과 대결하려는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결말 부분에서 인철은 나미네 집 파티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자기가 이제껏 쓰고 있었던 고깔, 즉 가면을 벗어버린다. 자신의 고독을 투철하게 의식한 새로운 삶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인철 일가의 비극은 백정이라는 그들 원래의 신분이 밝혀짐으로써 시작된다. 자기가 백정 자손이라는, 그리고 자신의 백부와 사촌형이 아직도 백정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륙상사 사장 아들인 인철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 인철 일가에는 마치 암종이 몸속에서 자라나듯이 몰락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다. 부모와 동생들에 대한 인호의 결별 선언에 뒤이어 인문의 뱀사건, 어머니 홍씨의 가출사건, 인철의 자기 고백, 아버지의 사업부진, 인주의 교통사고 등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불길한 기운이 필연성을 띤 듯한 사건들과 함께 몰락을 심화시켜 간다.

 이 작품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결같이 불행의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길을 열심히 모색한다. 작가는 이런 여러 등장인물에게 뚜렷한 개성을 부여하는 한편 그들이 해야 하는 역할, 즉 작품의 테마를 추구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