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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효석 단편소설 『돈(豚)』

by 언덕에서 2024. 6. 10.

 

이효석 단편소설 『돈(豚)』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의 단편소설로 1933년 [조선문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동반작가의 경향을 띤 작품을 주로 쓰던 작가는 이 작품을 전환점으로 하여 자연성을 예찬하는 서정적인 문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이때부터 소재를 자연과 인간에 돌려 본능의 순수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 소설은 돼지의 종묘 현장을 통해 한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욕망과 심리를 드러내고자 한 작품으로, 야생의 건강미가 돼지의 종묘와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한 인간의 애욕과 연관지을 수 있게 묘사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성 모퉁이 버드나무 까치 둥우리 위에 푸르등등한 하늘이 얕게 드리웠다. 바닷바람이 채 녹지 않는 눈 속에 덮인 종묘장 보리밭에 휩쓸려 돼지우리에 모질게 부딪친다. 벌써 두 번째로 오늘 식이는, 자기가 기르던 암퇘지를 종묘장에 끌고 나왔다. 씨돈(種豚)은 시뻘건 입에 거품을 물고서 말뚝 뒤로 돌아 암퇘지 위에 덥석 올랐다. 시꺼먼 바위 밑에 눌린 자라 모양으로 암퇘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두 번의 시도 끝에 종묘를 마친 식이는 옆집 분이가 도망간 일을 생각하다가 암퇘지를 끌고 장으로 나선다.

 세금 밀려드는 농가 형편에 돼지 가르기는 일 년 동안만 충실히 기르면 세금도 세금이려니와 잔 돈푼의 용돈쯤은 훌륭히 우러나왔다. 그래서 식이는 푼푼이 모은 돈으로 마을 사람들의 본을 받아 지난여름 갓난 양돼지 암수를 샀다. 한 달이 못 돼 수퇘지는 젖이 그리워선지 그만 죽고 말았다. 식이는 애지중지 암퇘지를 방안에 들여놓고 밥그릇에 물을 말아 먹이기까지 하면서 종일 시중을 들곤 했다. 여섯 달을 가르니 암퇘지 티가 제법 나서, 식이는 십 리가 넘는 종묘장에 끌고 나와 종묘를 하려 했으나, 아직 어려서인지 씨를 내리지 못했다.

 때마침 정을 두고 있던 옆집의 분이가 어디론지 집을 나갔다. 늙은 아버지를 혼자 버려둔 채 그녀는 외지로 나간 것이었다. 청진으로 갔다느니, 서울로 갔다느니, 며칠 전에 박 초시에게 돈 십 원이 왔다느니 소문이 있었으나, 식이는 종잡을 수 없었다.

 장에서 식이는 석유 한 병과 마른 명태 몇 마리를 사들고 마을로 향했다. 철로를 끼고 올라가 정거장 앞을 지나 오촌포 큰길을 나서니, 장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띈다. 걸어가는 식이의 등 뒤로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기차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그는 ‘이 길로 아무데로나 도망갈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장에 가서 돼지를 팔면 노자돈은 충분히 될 것이고, 그러면 도망간 분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날카로운 소리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든다. 찬바람이 앞을 스치고 불시에 한 몸이 딴 세상에 뜬 것 같다. 요란한 음향과 함께 바퀴소리가 쏜살같이 눈앞을 달아났다. 기차가 다 지나간 후, 식이는 전신이 불시에 빈 듯했다. 그에게서 석유병도 명태 마리도 간 곳이 없다. 손으로 이끌던 돼지 종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엉겁결에 돌아보지만, 돼지는 흔적도 없다. 아득한 철로 위에서 기차가 돼지를 달랑 들고 가버린 것이었다. 정신이 아득하여 식이는 금시에 그 자리에 푹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 작품은 <현대적 단편소설의 상모(相貌)>라는 글에서 이효석 자신이 언급하고 있듯이, “인간 본연의 것, 건강한 생명의 동력과 신비성..... 인위적인 것을 떠나 야생의 건강미를 영탄한 것”이라는 표현처럼 자연 속에서 구가하는 그의 낭만적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그가 총독부 검열계 촉탁직을 사직한 후 경성농업학교 교사로 함경도 땅에 은거할 시절에 발표한 작품으로, 사상적인 관심이 배제되고 탐미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후기문학의 성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도망간 애인에 대한 회고가 돼지 종묘라는 에피소드 안에 담겨 있으면서 소박한 서정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산>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자연 묘사가 얼마간 이 작품에 들어와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본능적인 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암퇘지를 공격하는 씨돼지와 마음속으로 '분이'에 대한 성적 욕망을 펼치는 주인공 '식이'가 동일시된다. 그러나 성욕을 동물적 본능으로서 제시하는 수준에 그칠 뿐,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탐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이효석은 자연성을 예찬하는 서정적 문학으로 돌아섰다. 주인공 식이는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 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이 작품은 <메밀꽃 필 무렵>, <들>, <분녀>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간의 성욕이 갖는 동물적 본성을 탐색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즉, 주인공 '식이'의 애욕을 돼지의 교접 행위와 병립시켜 나가면서 그 동질성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추하지 않은 것은 교접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에 잠재한 의식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효석이 사용한 에로티시즘은 D. H. 로렌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애욕을 위한 애욕을 그리고자 하지는 않았으며, 인간 본연의 것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에로티시즘을 사용했다.

 <분녀>에서의 돼지꿈이나 <독백>에서의 종묘장 돼지 등, 이효석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등장인물들의 성욕을 환기시키는 소재로 이용된다. '식이'에게 있어 암퇘지는 성욕의 대상으로서 '분이'와 동일시되며, 달아난 '분이'를 찾아 나설 노자 밑천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나가는 기차에 돼지를 잃어버림은 '분이'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1930년대에 대담하게 인간의 성 문제를 표현한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이효석의 소설은 성 자체에 대한 집념을 드러낼 뿐, 낭만적 서정성 또는 사회적 가치로서의 의미까지는 형상화시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