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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전경린 단편소설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by 언덕에서 2024. 6. 7.

 

전경린 단편소설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전경린(全鏡潾, 1962~)의 단편소설로 1996년 발표된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에 수록된 작품이다. 전경린은 마산 KBS에서 음악담당 객원 PD와 방송 구성작가로 근무했다. 성장기 내내 지독한 허무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그는 주어진 삶의 일회성과 자신이 열망해 온 영원성 사이에서 글쓰기를 발견하였다고 얘기한다.

 베스트셀러인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은 2002년 변영주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가정의 틀 안에서 안주하던 한 여성이 내면에 지닌 혼란스러운 욕구를 발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타나는 일탈과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섬세한 문체와 절제된 기법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삶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작가는 여성들의 욕망에 주목해 온 작가답게, 작품에서 현실의 엄마가 놓인 지형을 넘어서는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집의 전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염소를 방 안으로 몰고 오는 여자의 이야기인 <염소를 모는 여자>와 맑은 날에도 검은 우산을 쓰고 다니는 청년 이야기 등의 소설은 귀기(鬼氣)가 번뜩이는 강렬함과 마력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는 1996년 단편 <염소를 모는 여자>로 제29회 [한국일보] 문학상, 이어 1997년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제2회 [문학동네] 소설상, 1999년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제3회 [이수문학상(전 21세기 문학상)]을, 2004년에는 [대한민국 소설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화자인 ‘나’는 열한 살의 여자아이다. 나는 여동생 셋과 아버지, 어머니,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삼촌, 할머니와 한 집에 산다. 같은 지붕에는 신랑에게 자주 맞고 사는 월림댁 부부도 있다. 학교 앞 문방구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는 항상 배가 불러 있다. 첫째인 오빠 외에는 넷째까지 모두 딸이었으므로 아들을 하나 더 얻기 위해서 계속 임신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군청에 다니는 공무원인데 항상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멋쟁이다.

 ‘야야야야 차차차 기타 소리 땡땡땡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나와 사촌동생들은 삼촌이 월남에서 돌아온 후로 매일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삼촌은 몇 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또 급속히 상해갔다. 그는 마흔여섯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과 알코올중독과 성병을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에게는 문 계장이라는 직장동료가 있다. 문 계장은 어머니와는 달리 지성적인 노처녀인데 아버지와는 물론 나와도 좋은 관계이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문 계장의 집에 가서 피아노 교습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문 계장이 포옹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어머니는 또 딸을 낳는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빗자루로 방안의 삼신상을 부순다. 이러한 사실을 문 계장에게 이야기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 이에 문 계장은 나를 다시는 자신의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

 내가 문방구 가게를 보는 중에 문둥병 환자 손님이 들어온다. 손님이 지불한 돈이 많아 거슬름돈을 준비하는 중에 손님이 그냥 나간다. 내가 손님을 쫓아가 거슬름돈을 주자 손님은 연신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마지막 장면, 병마에 시달리던 삼촌이 영원히 눈을 감으면서 소설은 끝난다.

 

 동생들과 노래에 맞춰 안마당에서 춤을 추는 소녀, 교장집 아들과의 이상한 첫사랑, 선글라스를 쓰는 멋쟁이 아버지와 교양 있고 우아한 아버지의 애인 등 독특한 인물과 풍경들이 인상적인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은 누추한 세상살이의 단면을 들추어내며, 유년의 기억으로의 잠행을 통해 삶의 미세한 결을 읽어낸다. 작가의 소설은 견딜 수 없는 무게로 가해지는 여성의 고단한 운명을 종횡으로 가르고 있다. 사랑과 결혼은 희생이나 관용의 가치가 아니고 불온한 정념의 위험한 모험이다. 또한 동굴 같은 삶의 황폐한 풍경은 자아와 내면의 파탄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 소설은 1남 3녀 중 맏딸인 11살 소녀 인혜의 시점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아빠는 공무원이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지금 다섯째를 임신 중이다. 월남에서 돌아온 삼촌과 세 들어 사는 홀아비 장 씨와 월림 아주머니 부부, 인천댁과 같이 한 마당을 가지고 살고 있다. 매일 아이들은 트위스트 춤을 추며 아침을 맞이한다.

 특이한 점은 월림댁이 월림아재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다. 매일 맞고 또 나무에 묶여있어도 식구들은 풀어줄 생각을 않고 나중에 할머니는 지집은 연해야 된다며 그렇지 않으면 매타작을 맞을 수밖에 없다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표면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주인공 인혜의 어머니도 어린 인혜를 구박하며, 친척들도 인혜가 엄마를 위해서라도 아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섯째 또한 여자아이라서 엄마는 슬퍼했다. 이렇게 여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여성 스스로도 수동적이며, 순응하는 모습이다.

 

 

 ‘문계장은 피아노를 친 후에 꼭 손을 씻고 내게도 양은대야에 물을 담아주었다. 나는 문계장이 실파 같은 희고 연한 손을 씻을 때면 밤마다 동전을 세어 묶다가 잠드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으레 동전을 쥔 채로 졸다가 다 못 센 동전들을 장롱 밑에 밀어 넣고 잠들어버리곤 했다. - 본문에서

 작가의 소설은 낙원에서 추방된 인류의 슬픈 역사를 닮아 있다.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도 실낙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떠올리는 행복한 유년 시절은 안마당 장독대 앞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월남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삼촌과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 부르며, 홀아비 장 씨와 월림아주머니 부부와 인천댁은 이들을 보며 웃는다. 그곳은 온통 웃음과 꽃향기와 노랫소리로 가득한 일종의 낙원과도 같다.

 그러나 삼촌이 가져온 달콤한 초콜릿이 ‘마귀할멈에게 쫓기는 꿈을 꿀 때처럼 허황되게’ 느껴졌듯, 그 웃음과 행복과 평온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잠복하고 있다. 베트콩들의 시체를 배경으로 해서 웃고 서 있는 사진을 자랑스러워하며 보여주던 삼촌은 후에 정신이 망가진다. 월림댁은 걸핏하면 남편에게 매를 맞고 심지어 나무에 묶인다. 아버지는 문 계장과 열애 중이고, 엄마는 아버지를 묶어두기 위해 다섯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나’와 동생들은 ‘잘못 뽑힌 제비들처럼 꽝’인 인생들이다. 요컨대 안마당을 메우던 웃음과 행복은 가짜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