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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무영 단편소설 『흙의 노예』

by 언덕에서 2024. 3. 20.

 

이무영 단편소설 『흙의 노예』

 

 

이무영(李無影. 1908∼1960)의 단편소설로 1940년 [인문평론](1940. 4)에 발표되었다. 1939년에 쓴 소설 <제1과 제1장>의 속편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이 작품은 농촌의 소작농을 주인공으로, 이들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지주의 가혹한 이중 착취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내용은 농촌의 가난 문제를 보다 심각하고 치밀하게 파헤치고 있으며, 아울러 농민의 땅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가를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36년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정간되자 이무영은 한때 [조선문학] 지를 주재했다. 이 무렵 그는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의 한 사람이었고, 한편 [구인회(九人會)]의 한 멤버이기도 했다. 1939년을 고비로 하여 그는 인생과 문학의 일대 전환을 꾀하여 서울을 떠나 농촌인 군포(軍捕)로 가서 직접 농업에 종사하면서 <제1장 제1과>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농민작가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이어 <속 제1장 제1과(흙의 노예)> <농민> 등을 발표하여 농민문학의 선구자로서 농촌소설을 집필해 나갔다. 6ㆍ25 후에는 그 농촌세계가 도시를 제재로 한 시정소설로 바뀌어졌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을 나와 신문기자였던 수택은 막연한 동경으로 농촌에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 결과는 벼 넉 섬으로 다섯 식구가 반년을 살아야 하는 계산이 나왔다. 건실한 아버지도 삼 년 동안에 맨주먹이 되었고, 수택에게 준 땅마저 소작논인 것을 알았다. 그나마도 내년에는 소작권조차 떨어지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잘못 낸 대수문제와 같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수택은 뼈를 고향에 묻기로 스스로 다짐한 터였다. 그는 사립학교 동창인 용훈이를 찾아가서 소작 엿 마지기를 얻고, 자기 아버지를 모델로 하여 장편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논을 다 빼앗긴 늙은 농부가 휴지가 된 논문서를 들고 등잔불에 비추어 보는 처참한 광경을 핵심으로 한 내용이었다.

 수택이 아내의 장롱을 팔고 신문사에서 고료도 받아 마악 아버지의 소원인 땅을 사려는 때에, 병이 든 아버지는 땅값을 축낼 것이 염려되어 양잿물을 먹고, "찾아……땅…"이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수택은 땅을 되찾기 위해 집까지 팔아넘겼다. 도시를 동경하여 떠나는 조카 상태를 보내고, 수택은 지주네 집을 향하여 자전거 페달에 힘을 주어 달렸다.

 장례 후 수택의 눈물, 그 슬픔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슬픔이기도 했지만 '학문'을 조상하는 '무지'의 슬픔이기도 했다. '무지'를 경멸해 온 '학문'의 참회였다.

 

 

 이 소설은 일제의 식민지시장정책에 의한 우리의 농촌착취를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농민들의 가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택은 야학당(자기도 과거에 가르쳤던)에 들렸다가 선생으로부터 하루 죽 한 끼도 못 먹는 아이들이 파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울해진다. 수택의 부친 김영감의 땅에 대한 집착은 광적이었다.

 그는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지난날의 자기 땅을 찾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하면, 휴지가 되어버린 땅문서를 뒤적이기도 한다. 수택이 자신의 원고료와 퇴직금, 그리고 일부세간을 판 돈을 합해서 그 땅을 도로 사겠다고 하니 김영감은 뛸 듯이 기뻐한다.

 하지만 이미 병든 몸이다. 자신의 약값 때문에 땅값이 축날 것을 염려한 김영감은, "찾어- 땅-." 한마디를 남기고 양잿물을 마시고 자결한다. 김영감에게 있어서 땅은 그의 전부였고, 그는 철저한 흙의 노예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농민들의 일반적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식민지 치하에서의 농민의 가난과 가난한 농민의 흙에 대한 집착을 리얼하게 묘사함으로써 당시 농민들의 삶과 의식의 한 단면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식한 김 영감을 ‘흙의 노예’라고 이름 붙여 끝내 흙에서 나서 흙으로 죽어가는 흙의 인간성을 그리는 반면, 도회에서 문명의 이기를 맛본 주택과를 대립시켜 기계 문명에 반한 순수한 인간성의 재탐구와 무지를 몰이해하는 지식이 결국은 그 무지 속에서 참된 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농촌 생활의 참다운 적응은 농촌 생활이 궁핍과 모순의 생활이라는 사실에 대한 현실적 체험으로부터 나타난다. 체험을 통한 농촌 현실의 깨달음 수택으로 하여금 실천적 자각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기계문명에 밀리고 농촌 정책의 희생 때문에 점차 제 땅을 잃어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흙을 긍정하고 농촌과 친화하여 그 안에서 자기 생활을 창조해 나가는 작은 농민의 모습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농촌을 계몽하여 농민을 구한다는 교설적(敎說的)인 문학이나, 작의적(作意的)인 인물을 내세워 농촌을 일조일석에 개혁하려는 작품에 비하면, 이 작품은 농민 문학에 있어서 진보된 차원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이 소설 속에서 수택의 뜻을 치하하는 면장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긴상 같은 청년이 우리 면에 자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턱도 없이 농촌들을 싫어해서 큰 탈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 면에 한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국가로 본대도 크게 찬동할 만한 일입니다 “

 "……하여튼 긴상 같은 분이 우리 농촌 진흥 운동에 좋은 표본이 되어 주어야 하지요...."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산미(産米) 증식 사업이 한창이던 때, 소설 상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은 이무영의 소설이 단지 농촌의 모순된 현실(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지주의 가혹한 이중 착취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생활상)을 극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일인들의 국책 사업에 동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