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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유치진 희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

by 언덕에서 2024. 3. 6.

 

 

유치진 희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의 장막(전4막) 희곡으로 1953년 발표되었다. 의리도 애정도 당의 명령에 의해 짓밟히는 북한 공산치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발표된 대표적인 반공극(反共劇)으로 관념적인 반공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구체적인 테마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같은 해에 극단 [신협]에 의해 초연되고, 1955년에는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유치진의 <장벽>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한강은 흐른다> 등 일련의 반공을 주제로 한 작품의 하나이다. 그 당시의 반공극이 대개 ‘반공(反共)’이란 요란스러운 구호만 있고 드라마나 인간이 부재했던 일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은 이러한 모순을 지양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1막의 낭만성과 2막의 사실성, 그리고 마지막 막의 비극성은 ‘반공’이란 주제를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적절한 구성이 되고 있다. 영문(英文)으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된 바 있다.

 

유치진 극본, 영화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69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작곡가 백석봉은 당원이지만 남한에서 월북해 온 약혼녀 복희를 반겨 맞이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당성이 약하다는 의심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소련 2세 나타샤 김의 유혹을 거부한 탓으로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그는 몹시 고민하다가, “당이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인간이 당에 속하여 내가 그 괴뢰가 되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거다. 나도 인간이 되어야겠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말살하려는 공산주의의 쇠사슬을 끊어야겠어!”하고 그는 결연히 일어나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와 인간성을 쟁취하려 한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아버지대로부터 내려오는 공산주의자인 만큼 그가 죽으면 공산주의의 정체가 폭로될 것이 두려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살리려 한다. 그러나 백석봉은 비장하게 자살함으로써 죽음으로 공산주의에 항거하고 자유의 승리를 증명한다.

 

극작가 유치진 (柳致眞 , 1905~1974)

 

 유치진이 1932년 발표한 <토막(土幕)>에서 1958년의 <한강은 흐른다>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그가 발표한 희곡은 무려 40편에 가깝다. 특히 1933년 2월, 그의 처녀작 <토막>이 [극예술연구회]에 의해 무대에 올려지면서 삽시간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과 착취에 따른 이농 문제 등 당시 조선의 침통함을 정공법으로 묘사한 초창기 리얼리즘극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일제가 소위 국민문예라는 국책문화운동을 전개한 194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유치진은 총독부의 지시로 [극단 현대극장]을 만들어 극단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그는 <흑룡강>, <북진대> 등 친일어용희곡을 발표함으로써 평생의 오점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추나무>를 발표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희곡 창작에서 손을 뗀다. 해방 이후 우익 민족진영의 막후 리더로서 활동하던 유치진은 <조국>, <며느리> 등을 발표했으며, 이후 <자명고>를 위시한 <별>, <원술랑> 등의 계몽사극을 창작했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외세, 반탁 자주독립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직후, 유치진이 발표한 희곡들은 국가 상황을 고대사와 근세사를 빌어 우회적으로 풍자 비판한 일종의 목적성을 띤 작품들이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한 이후 [극연좌](1938), [현대극장](1941), [극예술협회](1947), [신협](1950) 등으로 이어지는 극단 활동을 전개했으며, 1950년대 초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극장]이 문을 열었을 때 초대 극장장으로 취임했고, 1960년대에는 연극 전용극장인 [드라마센터]를 세우고 [연극아카데미]와 극단 [동랑레퍼토리]를 설립하는 등 일생을 연극운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연극인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유치진은 1960년대 초 동국대학교에 연극과를 만들었으며, 서울대학교에 연극과를 설치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적도 있었고 숙명여자대학교에 최초로 희곡론을 개설하여 강의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와 연극학교,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연극인재 양성과 함께 한국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