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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차범석 희곡 『불모지(不毛地)』

by 언덕에서 2024. 2. 15.

 

차범석 희곡 『불모지(不毛地)』 

 

 

극작가 차범석(車凡錫.1924∼2006)의 2막 희곡으로 1957년 [문학예술]지에 발표되었다. 차범석의 희곡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1961)에 수록되어 있다. 전2막으로 이루어진 장막극이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최노인 일가의 비극을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 비롯된 가족해체와 가치관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세태고발적인 성격이 강한 사실주의극이다.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요소가 피폐한 삶의 의미로서의 '부모'라는 주제를 구체화시켜 주고 있다. 첫째는, 작품의 배경이다. 근대화되어 가는 도시의 한복판에 남아 있는 구식 한옥이 그것이다. 둘째는 작품의 등장인물의 성격이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자식들과 옛것을 고집하는 노인 사이에 성격적 대립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견상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가치관의 변화와 삶의 태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구시대는 이미 힘을 잃었고 새로운 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1950년대의 이 시기는 '불모지'였던 셈이다.

 1950년대의 서울 중심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빌딩숲으로 상징되는 외래문화와 구식 한옥으로 상징되는 전통문화와의 충돌로 대표되는 전후 사회의 모순을 세대간의 갈등구조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1950년대의 한국사회를 구세대도 신세대도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과도기적 시기로서 정신적ㆍ경제적으로 피폐한 ‘불모지’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작품은 동일작가에 의해 1962년 <태양을 향하여>라는 제목의 4막 희곡으로 개작되었다.

 

극작가 차범석 (車凡錫.1924&sim;200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혼구 대여점을 경영하는 최 노인은 아버지가 물려준 고옥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집착을 보인다. 신식 결혼이 성행하여 전통 혼례용 혼구를 대여하는 최 노인의 사업이 날로 쇠퇴하게 되자,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집을 팔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최 노인의 고집은 꺾일 줄을 모른다. 군을 제대하고 초조하게 취업 통지서를 기다리는 큰아들 경수, 그 아들을 염려하는 어머니, 인쇄소의 식자공으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있는 차녀 경운, 대학 진학을 앞둔 막내 경재 등 가족들 모두가 은근히 최 노인을 원망하며 집을 팔자고 종용한다.

 결국 가족들의 성화와 큰아들의 방황을 보다 못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최 노인은 집을 세 놓기로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집을 팔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한 경수가 이를 막으려 하고, 최 노인은 아들의 행동을 집을 팔지 않고 세 놓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여겨 심하게 꾸짖는다.

 이에 모든 불화의 원인이 돈에 있다고 생각한 경수는 대낮에 총을 들고 나가 강도질을 하려다 경찰에 붙들린다. 한발 늦게 날아든 취업 통지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한편, 배우를 꿈꾸던 장녀 경애는 심사 위원을 사칭한 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울분과 체념 속에 자살을 선택한다. 큰아들을 형사들 손에 이끌려 보낸 뒤 얼마 후 딸의 시체를 발견한 최 노인의 비탄 어린 절규가 극을 끝맺는다.

 

 

 이 작품은 전후의 어둡고 불안한 사회상황을 한 가족의 생활 단면을 통해 집약적으로 드러낸 사실주의 작품으로, 1950년대의 시대상을 잘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희곡으로 평가된다.

 이렇듯 구시대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쳤던 최 노인의 모습과 그에 따라 비롯된 가족간의 갈등과 비극은 새 시대를 맞기 위한 진통의 역설적 현실이기도 하다. 한 가족의 이러한 비극적 삶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고층건물의 모습과 대조되어, 전후의 불모(不毛)의 현실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제시해 준다.

 이 작품에서 최 노인과 자식들의 면모는 전후시대의 세대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전후의 시대상을 냉철하게 드러내준다. 이러한 특징은 일반적으로 1950년대 희곡의 대표적인 경향을 형성한다.

 

 

 이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각 인물의 성격이 어떤 유형을 이루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대화에 대한 삶의 뿌리를 뽑힌 최 노인, 모순 된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지식인 경수, 허영과 사치에 눈이 멀어 배우를 꿈꾸는 경애 등 자신의 역할과 현실 간의 갈등으로 파멸해 가는 피해 입은 인물과, 그러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어머니, 경재, 경운의 인물 유형이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지만, 이들이 한 가족이기 때문에 작품 전체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이 작품에서 세대간의 갈등이 어떠한 대사와 행동으로 나타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이 바로 현실 사회의 모순 때문에 야기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만큼 이 작품은 사회적 현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희곡은 최노인 가족의 비극적인 생활단면을 통해 신구세대간의 갈등과 현실적 모순을 집약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전후 한국사회의 어둡고 불안한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실비판적인 작품이다. 차범석의 초기 작품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특징적으로 반영하던 1950년대 희곡의 일반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희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