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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이근삼 희곡 『원고지(原稿紙)』

by 언덕에서 2024. 3. 25.

 

이근삼 희곡 『원고지(原稿紙)』

 

 

이근삼(1929~2003)의 단막 희곡으로 1961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이 부조리극은 이근삼의 대표적 희곡으로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들 간의 갈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인의 무기력한 모습을 희극적으로 풍자, 비판한 단막극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잊어버린 채 기계적인 일상생활에 얽매여 살아가는 한 가정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렸으며, 희극적 효과를 위해 지문과 대사에도 속어를 사용하고, 인물과 소도구의 표현을 비현실적으로 과장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평양사범 졸업 후 월남한 이근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미국 북캐롤라이나 대학원 졸업, 뉴욕대학원 수료했다. 1957년 미국에서 영문 희곡 <다리 밑(Below the bridge)> <끝없는 실마리(The Eternai Thread)>가 미국 노스캐로라이나 극장에서 공연되면서 극작가로 등단했다. 이근삼이 국내에서 발표한 첫 희곡은 1960년의 단막극 「원고지」이며, 그 후 계속해서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동쪽을 갈망하는 족속>들> 등 단막극을 발표해 오다가 1962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상연한 <위대한 실종(失踪)>(3막)을 계기로 장막극을 계속 발표했다. 극단 [민중극단]의 대표로 있으면서 연극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년의 대학교수인 한 남자는 처와 아들, 딸과 함께 그럭저럭 살고 있다.

 교수는 물질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가족의 압박을 받으며 피곤한 몸으로 귀가한다. 하지만 남편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아내는 쉴 틈도 주지 않고 교수에게 번역을 재촉한다. 자식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돈 벌어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아내는 남편이 돈 벌어오는 것을 챙기는 데 혈안이 돼있다. 교수는 중압감으로 인해 정신적 혼란을 느끼며 잠이 들지만, 관념적 존재인 감독관이 나타나 교수에게 번역 원고를 독촉한다. 중년의 대학교수는 여러 가지 중압감으로 인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혼동하고, 밤 8시를 아침 8시 강의하러 나갈 시간으로 착각하는 등 일상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서 무의미하게 계속되는 번역일, 자식에 대한 책임과 아내의 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일하는 대학교수에게 젊었을 때의 꿈과 정열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다. 원고를 돈으로 바꾸는 데 여념이 없는 아내 옆에서 교수는 백구십 칸 원고지를 발견하고 탁 트이는 기분을 느끼고, 이를 계기로 젊은 날의 희망과 정열을 상징하는 천사를 만나고 생각할 힘을 갈구한다.

 하지만 다시 나타난 감독관의 재촉을 받으며 교수는 비참한 표정으로 다시 번역에 매진한다.결국 또다시 일상은 반복되고 교수는 똑같은 생활을 강요당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극작가 이근삼 (1929~)

 

 이 작품의 인물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기계적인 순응만 보일 뿐,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가족들 사이의 진정한 의사소통이나 연대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이처럼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망각한 채 기형화 된 삶을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소외된 삶의 모습을 그린 단막 풍자극이다. 무의미한 일상생활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사실주의 연극의 극작술(劇作術)과는 전혀 해설을 한다든지 무대 장치와 소도구들을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과장한 것도 현대극의 실험적 수법을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실험극에서는 사실을 충실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주로 사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반(反) 사실적이며, 반(反) 표현적이어서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대변해 주는 현대 희곡의 한 특징이 된다.

 

 

 『원고지』는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망각한 채 기형화 된 삶을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단막 풍자극이다.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일정한 사건의 전개도, 갈등도, 위기도 없다. 다만 하나의 상황이 있을 뿐이다. 즉 작품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은 어떤 특수한 배경이나 심리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현대인이 매일매일 겪고 있는 상황의 한 토막이다. 다소 문제가 되고 있는 갈등이라면, 도식화되고 타성에 젖은 생황에 대한 주인공(교수)의 회의가 그 전부이다.

  한편 이 작품은 의미한 일상생활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수법을 활용한 점이 사실주의 연극의 극작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작중 인물이 관중을 상대로 말을 걸어서 극 중 상황을 설명한다든지, 무대 장치와 소도구들을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과장한 것도 현대극의 실험적 수법을 활용한 것이다.

 

 


 

☞<부조리극> : 인생의 무의미, 무목적, 충동성 등을 표현하는 연극의 한 갈래로서, 1950년대 현대인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고발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