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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현덕 단편소설 『남생이』

by 언덕에서 2024. 4. 23.

 

현덕 단편소설 『남생이』

 

 

월북 소설가 현덕(玄德. 1912∼?)의 단편소설로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1936년 발표된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만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내용이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현덕은 서울 출생으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다가 중퇴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아동문학부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한때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장을 맡기도 했다. [조선문학가동맹]의 이념노선은 조선공산당의 문화운동 노선에 따라 규정되었다. 그러므로 현덕의 월북은 자신의 의지로 실천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경칩>(조선일보.1938) <층(層)>(조선일보.1938) <두꺼비가 먹은 돈>(조광.1938) <골목>(조광.1939) <잣을 까는 집>(여성.1939) <녹성좌>(조선일보.1939) <군맹>(매일신보.1940)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단편소설과 함께 아동소설도 여러 편 발표하였다. 곧, 1938년 [소년]에 <하늘 맑건만> <권구시합(拳球試合)>, 1939년 같은 잡지에 <고구마> <강아지> <두포전> <집을 나간 소년> <잃었던 우정>을 발표하였다.

 그는 월북 후에도 한동안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한국동란이 끝난 다음에 발표한 <부싱쿠 동무>(1959) <싸우는 부두>(1961) 등의 단편소설이 그것이다.

 

월북 소설가 현덕(玄德. 1912&sim;?)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노마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를 듣고도 노마는 못 들은 체한다. 노마는 지금 영이와의 놀이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못 들은 채 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반항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는 노마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은 옷을 입고 항구에서 다른 남자들과 희희낙락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노마를 앉혀 놓고 항구에 나오기 전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영이 할머니의 말을 믿고, 고향을 떠나 이 항구로 온 것이었다.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항구에서 짐을 져 나르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몸이 망가진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노마의 어머니는 들병 장수로 항구에 나가게 된 것이다.  항구에서 머리를 깎아 생활하는 바가지는 노마 어머니에게 지분거리지만, 노마 어머니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는 노마 어머니가 장사하는 곳에 항상 나타나 장사를 방해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노마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노마 어머니와 사귀는 털보도 곧잘 노마 아버지가 있는 방에 찾아오기도 했다. 이럴 때면 아버지는 털보의 눈치를 보며, 방을 비워주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노마 아버지는 못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차리는 아내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깨뜨리었다. 그는 자신이 성냥갑 붙이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노마 아버지가 하는 일은 일의 진도가 더디게 나갈 뿐이었다. 노마 어머니는 이런 남편의 행위를 두고 보기만 한다. 노마 어머니가 늦게 돌아오는 날은 명이 할머니가 저녁을 지어 주러 왔다. 노마 아버지는 명이 할머니가 못마땅하다. 그는 자신을 항구에 오게 한 명이 할머니가 원망스럽다. 또한 노마 어머니가 들병 장수로 나가게 된 것도 영미 할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이 할머니에게 심한 구박을 하지만 영이 할머니가 자신을 돌보아 주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가 있을 매는 그녀를 구박하지만 없어지고 나면 또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며칠 만에 온 영이 할머니의 손에는 남생이 한 마리와 부적이 들어 있었다. 못된 병을 쫓는다는 말에 노마 아버지는 남생이를 귀하게 다룬다. 남생이가 생긴 후, 아버지는 노마를 부르지 않았다. 그것이 노마는 좋았다. 노마는 아버지 곁에서 놓여나 놀러도 다닐 수 있었다. 그는 곰보가 항상 올라가던 양버들 나무를 오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좀처럼 오를 수가 없었다. 노마는 이 나무를 오르기만 하면 어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노마가 급기야 양버들 나무를 올라갈 수 있던 날, 노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그렇게 어렵던 나무가 힘 안 들이고 서너 간 높이 쌍가지 진 데까지 올라가졌다. 나무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 보는데, 할머니가 울상을 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영이 할머니는 노마에게 마치 남생이가 없어져서 노마 아버지가 죽었다는 듯이 남생이가 어디로 갔는지를 물어본다.

 그날 동네 여인들은 노마에게 곰살궂게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 머리도 쓰다듬고 떡 같은 것도 갖다준다.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노마에게 울기를 권하지만, 노마는 아니 나오는 물음을 소리만 높여 울면 흠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호젓한 뒷담 밑으로 돌아가 노마는 물음이 나오라고 슬픈 생각을 만들지만, 눈물은 좀체 나오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늘 노마가 올라갔던 나무에 대한 기쁜 생각만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단편소설 『남생이』는 노마 가족의 비극을 소재로 하는 현덕의 작품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현실의 문제와 노마로 대표되는 어린이의 시각이 작품 속에서 잘 형상화되고 있는 소설이다. 작품의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소설의 줄거리는 노마 아버지의 투병과 노마 어머니의 들병장수이다. ‘들병장수’는 병에다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술을 파는 창녀를 뜻한다. 노마 아버지는 마름의 행패를 견디지 못해 폭행하고 항구로 들어오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항구 생활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농민이 노무자로 전락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하지만 노마 아버지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병을 얻는다. 그리고 노마 가족에 대한 비극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노마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권의 위기를 가져온다. 이것의 필연적인 이유로 노마 어머니는 들병장수를 나가게 된다. 하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노마 아버지로서는 아내의 행위를 말릴 수 없다. 항구에 나가지 말 것을 종용하는 남편의 말에 노마 어머니가 비웃는 것도 경제권을 상실한 가장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을 의미한다. 아내를 찾아온 사내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는 노마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러한 비극은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는 털보에게 어떠한 반항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인해 그는 자율 의지가 박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되는 이러한 현실의 문제는 그러나 노마에게는 아무런 중요한 의미가 있지 못한다. 노마가 어머니를 비난하는 것은 어머니가 돌보아야 하는 아버지를 노마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노마가 일으키는 분노는 자신과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좋은 옷을 입고 항구에서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노마가 느끼는 감정은 어머니의 행위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노마는 자신만 좋은 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는 어머니에 대해 질투를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노마의 유년의 순수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년기적인 노마의 생각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버드나무에 올라가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은 유년기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편입하기 위한 입사 과정의 한 형태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무 오르기의 과정이 완수되는 날,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는 장면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비극적 삶이 끝나고 새로운 형태의 노마의 삶이 제시됨을 암시한다.

 '노마'로 대표되는 유년기의 세계는 세상에 대한 허위와 가식이 배제된 상태이다. 이것은 노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확인된다. 노마 어머니의 물음은 거짓의 물음으로 상징화된다. 노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노마로 대표되는 세계가 가식의 세계가 마니라, 진실성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의 부정성으로 치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