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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이강백 희곡 『파수꾼』

by 언덕에서 2024. 5. 18.

 

이강백 희곡 『파수꾼』

 

이강백(李康白. 1947∼)의 희곡으로 1973년 [현대문학]에 발표되었고, 1975년 [현대극회]가 연극인 회관에서 공연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못지않게 검열이 횡행하던 그 시절에 연극 속에서 몸부림친 현실은 제도적 폭압에 짓밟히는 연약한 개개인 삶 그 자체였다. 이강백은 그 점에 착안해서 현실을 비극적으로 형상화하기보다는 그러한 체제 이면에 숨겨져 있는 권력의 위선과 모순을 폭로하고자 했다. 또 그러한 제도적인 면 뒤의 인간적인 보편성까지 파악하고자 하는 철학적인 시도가 이어진다.

 마을의 질서와 방위를 위한 방편책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이리 떼를 가상으로 설정, 이리 떼의 습격에 대비하여 망루를 세우고 수시로 경보 신호를 울려서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주된 내용인 이 희곡은 국가 안보에 대한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국가와 정부에 대해 불신을 일으키며 세대와 세대 간의 반목과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공연 윤리 심사에서 반려된 작품이다.

소극장 [소금창고] 개관공연으로 선보이는 연극 [파수꾼]. <극단 구리거울 제공>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망루가 세워져 있는 황야에서 파수꾼은 끊임없이 이리 떼의 내습을 감시한다. 파수꾼이 양철북을 두드리면 즉시 대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나날의 연속이다. 파수꾼 '다'는 선임 파수꾼 '가'의 '이리 떼다! 이리 떼'라는 외침과 양철북 소리에 항상 긴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는 이리 떼를 본 적은 없다. 그 역시도 신호밖에 듣지 못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신호에 겁을 먹고 피하다 다리가 부러지고, 아이는 우물에 빠져 죽는 등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어느 날 저녁, '다'는 파수꾼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사이, 두려움을 안고 망루에 올라가 파수꾼 '가'가 이리떼라고 외치는 것의 정체는 흰구름이라는 사실을 알아 그 사실을 촌장에게 알린다. 촌장은 '다'를 찾아와 이리떼가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촌장은 이리 떼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한 사람들의 긴장이 마을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단결된 역량을 모아 나름대로의 번영을 지속시켰다는 말로 '다'를 설득한다. 촌장의 설득에 '다'는 망루에 올라 파수꾼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흥분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상의 업무로 돌아왔을 때 멀리 파수꾼 '다'의 외침이 들여온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양치기 소년과 이리'라는 우화 형식을 빌려 당대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고 권력의 위선과 허위를 폭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권위주의에 의해 통치되던 197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우화적인 기법을 활용하여 당대 권력의 위선적인 실체를 건드려 보고자 한 매우 의욕적인 시도를 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는 팽팽한 갈등을 전제로 하는 극 양식의 원리에서 보면 그 갈등의 축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관객들은 우화라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화적인 장치가 가지는 연극적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극은 인간의 삶을 무대라는 객관화된 공간 위에서 연출해 관객에게 보여 주는 양식이다. 극의 이러한 보여주기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작품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극 중 사실의 발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발견으로까지 이어진다. 관객들은 작품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과연 올바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서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짓보고에 앞장서는 소년 파수꾼을 보면서 연민과 동시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