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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함세덕 희곡 『동승(童僧)』

by 언덕에서 2024. 1. 26.

 

함세덕 희곡 『동승(童僧)』

 

 

월북 극작가 함세덕(咸世德, 1915∼1950)의 희곡으로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연극콩쿠르에 입선작이다. 함세덕의 작품들은 광복 전 우리 희곡사에서 유치진에 버금가는 탁월한 작품성을 견지하고 있는데도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못했다. 1991년에야 비로소 극단 [연우무대]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고 잇달아 다른 작품들도 공연되면서 함세덕의 희곡사적 위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함세덕이 정식으로 연극계에 데뷔한 것은 1940년 <해연(海燕)>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때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 직후 좌경하여 <기미년 三월 一일>(1946), <태백산맥>(1947) 등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잇달아 내고는 1947년 월북하였고, 한국전쟁이 나자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수류탄사고로 그 해 사망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유치진에게서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함세덕은 그의 대를 이을 가장 촉망받는 극작가로 지목되었지만, 해방 후 진영논리에 가려진 불운한 작가였다. 그렇지만 그의 탄탄한 극구성과 풍부한 언어 구사력, 작품을 감싸 안는 서정적 감성은 그의 작품들을 한국 연극계의 단단한 초석으로 남게 하였다. 함세덕은 총 29편의 작품을 썼으나 현재 남은 작품은 15편에 불과하다. 그는 극작 외에는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주로 어촌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썼는데 그의 소설 대부분이 소재 자체도 이채롭고 대사의 표현이 뛰어나 주목을 끌었다. 묘는 경기도 구리시 망우공원묘지에 있다.

 단막극 『동승』은 어느 동승의 환속기다. 작자가 학창 시절에 금강사에 놀러 갔다가 마하연에서 본 사미승에게서 받은 느낌을 작품화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극연좌]('극예술 연구회'의 후신)가 1939년 3월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 경연대회에 <도념(道念)>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여 초연했으며, 해방 이후 간행된 희곡집 「동승」에 수록되었다. 또한 이후에도 <내 마음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으며, 월북 작가의 작품이 해금된 1988년 이후에는 [연우무대] 등 여러 극단에서 재공연 되어 호평을 받았다. 희곡집 「동승」의 제목이 대변해 주듯, 이 작품은 함세덕 최고의 작품이며 '한국 근대희곡사상 가장 탁월한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오래된 절에서, 아직 수행을 쌓지 않은 열네 살의 사미승 도념은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의 생모는 여승이었으나 사냥꾼을 만나 파계를 하고 절을 떠난다. 주지승은 생모의 행적을 들어 도념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을 포기하도록 하지만, 어린 도념으로서는 모자의 정을 쉽게 끊을 수 없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미망인에게 마음이 끌리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던 미망인 또한 도념을 수양아들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도념을 타락한 속세로 보내지 않으려는 주지승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게다가 살생을 금하는 계율을 어기고 도념이 토끼를 잡은 것이 탄로나서 미망인의 입양 계획은 무산되어 서울행이 좌절되자 도념은 결국 홀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절을 떠난다.

 

 

 이 작품은 함세덕의 초기 작품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는 희곡으로, 한 동승의 환속기를 그리고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세속적 욕망과 종교적 제약 속에서 살아야 하는 한 동승과 고운 인정을 소유한 미망인, 정심 등의 주변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리움과 기다림, 기다림의 좌절, 세속으로 뛰쳐나옴 등이 긴밀한 구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어머니와 닮은 모습으로 느껴지는 서울의 미망인과의 모정을 통해 그 어느 작품보다도 훌륭한 서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취급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심오한 불교적 사랑을 담고 있다.

 어린아이에게 불도에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주지 스님의 모습에서도 아버지와 같은,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꾼인 초부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린 도념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동정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취급하고 있으면서도 이면적으로는 보다 심원한 불타적 사랑을 변증법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영화 [내 마음의 고향], 1949년

 

 

 이 작품은 인간의 삶에 내재한 근원적인 고독과 비애를 종교적인 감성으로 잘 포착하고 있다. 무대는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 고찰이다. 열네 살의 사미승 도념은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도념은 불가에 몸담고 있지만, 마을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독경 소리보다 좋게 들리고, 스님 몰래 토끼사냥을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어린아이다. 주지스님의 호된 꾸지람을 들으며 불가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과 이를 벗어나서 어머니와 친구들이 있는 세속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 사이의 골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그 골을 깊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미망인과 초부이다. 도념은 미망인에게서 어머니의 허상을 보며, 초부에게서 세속 세계의 따뜻함을 경험한다.

 결말 부분에서 도념은 결국 어머니가 존재하는 속세를 향해 홀로 떠난다. 도념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불성이 아니라 인성이었다. 이러한 결말은 자칫하면 감상성으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말없이 도념을 도와주는 초부와 정심, 겉으로는 엄격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도념을 사랑하는 주지 스님, 죽은 아이 대신에 도념을 수양아들로 삼으려는 미망인의 간절한 심정을 적절히 배치하여, 참다운 사랑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누구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보편적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