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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유치진 희곡 『흔들리는 지축(地軸)』

by 언덕에서 2024. 1. 5.

 

유치진 희곡 『흔들리는 지축(地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 쓴 연극 대본으로 일제강점기의 탄압상과 조국광복의 환희를 그린 단막 희곡이다. 일종의 사회 상황극이며, 광복 전후, 서울에서 가까운 어느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감동적인 실제감을 전해 주는 계몽적 단막극이라고 할 수 있다. 1947년 1월에 발표된 작품으로 [성문각]에서 출판한 <유치진 희곡전집>(1971)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한국연극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사실주의 희곡작가로 평가되는 유치진의 창작희곡으로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조국을 되찾은 광복의 기쁨을 객관적으로 그려낸 사실주의적 상황극이자 계몽적 성격을 띤 단막 희극이다. 이 작품에서 주요 등장인물로는 조국의 광복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망을 지닌 청년으로 징병을 피해 다니다 여주인공 옥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광복을 맞이하는 인물 강을봉, 강을봉을 숨겨준 혐의로 일본인 순사에게 잡혀가 고문당하는 김첨지의 딸 옥분, 옥분을 좋아하는 젊은이로 일본인에게 빌붙어 사는 반동적 인물 태복, 비열한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일본인 순사가 등장한다.

 

극작가 유치진 (柳致眞 , 1905 &sim; 197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근교에 사는 청년 ‘을봉’은 일제의 징병을 피해 산으로 숨어 다닌다.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다가 마을 처녀 ‘옥분’을 만난다.

옥분은 아버지의 점심을 가지고 왔다가 을봉을 만나고, 순사에게 쫓기는 을봉을 숨겨준다.

 그러는 사이 둘에게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싹튼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옥분이 일본인 순사에게 잡혀가 고초를 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옥분이 잡혀간 것에 분노하는 가운데, 을봉의 아저씨 ‘강돌’이 해방의 소식을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지만 종국에는 마을 전체가 해방의 감격에 휩싸인다.

 

 

 

 우리 근대연극사에서 동랑 유치진만큼 희곡창작, 연출, 연극교육, 극장운영 등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한 연극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는 극작가가 부족했던 우리 연극계 현실에서 일찍부터 창작극을 써서 무대에 올림으로써 근대적 희곡과 연극을 이 땅에 정착시킨 선구자이다.

 1932년 발표한 <토막(土幕)>에서 1958년의 <한강은 흐른다>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그가 발표한 희곡은 무려 40편에 가깝다. 특히 1933년 2월, 그의 처녀작 <토막>이 극예술연구회에 의해 무대에 올려지면서 삽시간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과 착취에 따른 이농 문제 등 당시 조선의 침통함을 정공법으로 묘사한 초창기 리얼리즘극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일제가 소위 국민문예라는 국책문화운동을 전개한 194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유치진은 총독부의 지시로 극단 현대극장을 만들어 극단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그는 <흑룡강>, <북진대> 등 친일어용 희곡을 발표함으로써 평생의 오점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추나무>를 발표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희곡 창작에서 손을 뗀다. 해방 이후 우익 민족진영의 막후 리더로서 활동하던 유치진은 <조국>, <며느리> 등을 발표했으며, 이후 <자명고>를 위시한 <별>, <원술랑> 등의 계몽사극을 창작했다.

 

 

 좌우 대립이 첨예했던 해방기에 우익 작가의 노선에 있었던 유치진은 「흔들리는 지축」을 통해 해방의 감격과 해방기의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을봉’은 일제 말기의 시점에서 징병을 피하고자 했던 청년이다. 을봉은 스스로 독립 투쟁과 혁명적 실천에 가담하지 못하는 도피자인데, 해방의 구원자로 미국에 의탁하고 있다.

 을봉 : 아메리카 비행기야! 야아! 이 B29야, 제발 날 좀 실어 가라구!.

 이는 작가의 예술적, 정치적 입지가 반공 우익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징병을 피하려는 을봉의 처지가 문제적인 상황일 뿐 구체적인 극적 갈등이 선명하게 창조되지 못한 점은 이 작품이 가진 한계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주어진 ‘해방’에 의해 ‘을봉→일제→옥분’의 제국-피식민자의 갈등이 저절로 해결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서울에서 가까운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식민지 말기의 역사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사실극임과 동시에, 광복의 진한 감동을 연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계몽극이다. 유치진의 작품세계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눌 때 후기 작품에 속하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계몽적 민족주의의 성향을 띠어 예술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