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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허준 단편소설 『습작실에서』

by 언덕에서 2023. 11. 21.

 

허준 단편소설  습작실에서

 

 

월북 작가 허준((許俊. 1910∼?)의 단편소설로 1946년 [문장]지에 발표되었다. 허준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세계는 허무주의적 색채가 농도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그의 등단 작품 <탁류>에서부터 허무 의식이 깔린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비롯된다. 『습작실에서』의 연작 형태의 소설에서도 허무 의식과 고독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라는 고독한 자아의 내면심리를 그려낸 『습작실에서』는 주인공이 벽지의 어느 산골 병원에 있는 T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백의 문학이다. 특별한 사건 전개가 없는 이 작품의 주제는 결국 ‘나’의 고독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생활에 대한 거리 두기를 고독과 동일선상에 놓고 즐기고 있다. 그에게 있어 고독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들이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치스러운 물건인데 자기 자신의 내부가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허준은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서울시지부 부위원장,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잔등>(대조. 1946.1∼7) <한식일기>(민성. 1946.6) 「속(續) 습작실에서」(조선춘추. 1947.12) <평 때저울>(개벽. 1948.1) <속 습작실에서>(문학. 1948.7) <역사>(문장. 1948.10) 등을 발표하다가 월북하였다.

 

월북 작가 허준(許俊 .1910 -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방학이 되어도 집에 가지 않고 일본에서 산장으로 스키를 타러 갔다. 시험이 끝난 예과 동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산장은 밤으론 떠들썩했다. 나는 밤에 가지던 나의 조용하고도 은근한 즐거움이 다 덜어지지나 않을까 혼자 근심도 하였으나, 가루따를 치고, 사치기를 하고, 한데 어울려서 오께사를 추는 동안에 어느 결엔가 자기도 그들의 한 부분이 되고, 자연이 한 분자가 되어 자연과 생활을 함께 구가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안심하였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그 해도 벌써 그믐날이 되던 날 밤이었다. 이 날은 이상하게도 아침부터 없던 눈이 내리는 날이어서 동료들은 거의 산장에 남아 있고, 모리씨도 전날 삔 발이 낫지 않는다고 하여 집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는데, 나는 아침에 나와서 어슬어슬하는 초혼(初昏)이 지날 때까지 혼자 겔렌데에 남아 있었다.

 나는 설을 산장에서 새기로 하고, 설날 떠나는 것도 일이 아니어서 하루를 더 묵은 이튿날 아침 온천을 떠났다. 나는 동경으로 들어가는 가치 본선 속에서 내 집주인의 둘째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정초인지라 동경으로 들어가는 찻간은 빈 편이어서 처음은 마주 앉아도 알 리가 없었으나, 내가 먼저 의심이 나서 신사의 성씨를 묻게 되어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그 젊은 신사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임종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내가 산장으로 떠날 때의 집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걸 좀 보아주십시오. 이것이 내 아버지가 없으신 뒤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아준 파출부에게서 부쳐 온 것입니다. 내 형도 임종에는 미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가 내 무릎 위에 꺼내어 놓은 편지를 나는 사양 없이 손에 들었다.

 ‘나는 꼭 내가 살던 모양으로 자연스럽게 죽기를 결심하였다. 이것은 아무 교훈거리도 아니요, 내 자연에 어그러지는 억지도 아니니, 너는 아버지가 너희들을 불러올리지 않은 것으로 사람의 이 세상 인연이 그처럼 쓸쓸한 것이란 생각을 먹지 않기를 바란다. 내 생은 결단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서양의 어떤 종교가들은 아침 일어나는 길로 자기의 손으로 지어 둔 관곽에 한 번씩 들어가 누웠다가 나와서 그날 하루씩을 살아간다고 하거늘, 세속적으로 보더라도 내 죽음은 그만큼 다행하였다 할 것이다.’

 “내가 스키 떠난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내가 방학마다 집에 아니 간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허준의 문학사에서의 위치는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삶이냐’의 명제와 '인간은 어쨌든 사는 것이다'의 명제에서 자기 분열에 처해졌던 식민지 지식인층의 한 유형 속에 그가 전형적으로 포함된다는 곳에 있다. 이들 일군의 지식인층의 세계관은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과 동포에 대한 우월감에서 오는 미안함에 의해 자기 분열을 일으켰고, 여기서 빚어진 것이 '생에 대한 적극성 상실'이다. 이 계층은 토착 부르조아지들이었고, 근대라는 진보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춘원(春園)의 계몽주의와 프로문학 계열로 대표되는 ‘사이비 근대주의자’들이었고, 이들과 비교할 때 최명익(崔明翊)이나 허준은 ‘보다 진정한 근대주의자’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들 진보주위자들은 [시인부락파]나 [시문학파]의 반근대주의와 대척되는 입장이었다. 허준 등으로 대표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주의자들이 8ㆍ15를 ‘빛의 회복’으로는 물론, ‘해방’의 의미로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왜냐 하면, 해방 공간 속에서의 이들 계층의 의식 구조는 일제강점기와 조금도 달라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이 계층이 격심하게 강박(强迫)되었던 일본인에의 열등감이 이번엔 사이비 애국자들을 향한 모멸감으로 대체되었고, 동포들에 대한 우월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 김윤식 : <한국 현대문학 명작사전>(일지사. 1982) -

 

 

 허준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허무 의식과 고독감에 젖어 있는 그의 자의식의 세계는 해방 후의 감격적 현실에 휩쓸리지 않고, 당대 현실의 일상적인 국면과 삶의 의미에 대한 심도 있는 탐색을 제시하려는 작가 의식을 담고 있다. 그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세계는 허무주의적 색채가 농도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그의 등단 작품인 <탁류>가 허무 의식이 깔린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 주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 후 [조선일보]에 발표된 <야한기>와 [문장]에 발표되기 시작한 『습작실에서』의 연작 형태 소설에서도 허무 의식과 고독감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허무 의식과 고독감에 젖어 있는 그의 자의식의 세계는 해방 후의 감격적 현실에 휩쓸리지 않고 당대 현실의 일상적인 국면과 삶의 의미에 대한 심도 있는 탐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편소설 『습작실에서』는 '북지 어느 산골 병원에 계신 T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소품이다. 편지 형식이라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T형을 상대로 하는, 자기 고백적 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다. 따라서, 『습작실에서』는 노인의 고독과 자살,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인 외로움 등이 농도 짙게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허무와 나 혼자라고 하는 고독의 의식'을 통하여 인간 내면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