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단편소설 『대설부(大雪賦)』
한수산(韓水山.1946~)의 단편소설로 1978년 발간된 소설집 「4월의 끝」[민음사]에 게재된 작품이다. 해당 단편집에는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쓴 단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유신과 긴급조치, 산업화와 새마을운동, 달동네 판자촌, 전태일의 분신 등으로 기억되는 1970년대의 한복판에서 발표된 작가의 첫 작품집은 죽음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과 그 죽음이 가져온 단절을 이야기하며, 당시 우리 사회의 역동성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인다.
한수산의 대부분의 작품은 '물빛 새벽 하늘이나 조춘에 뻗어 나는 덩굴손처럼, 혹은 어둠 속에 비치는 수은등불처럼 가슴에 와 닿는 부드러움'에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공허한 공상적 언어가 아니라, '쇠에 녹이 슬 듯 시간 속에서 마멸되어 가는 육체의 언어들'로 짜여진 삶의 존재론적 내면 풍경들이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는 젊은 건축가였던 형이 공사 현장에서 실족하여 수술 중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의식에 사로잡힌다. 형의 죽음을 접하며 '나'는 방음이 된 방에서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고, 유년 시절 형과의 경쟁과 갈등을 회상하며 형에 대한 슬픔과 애정을 느낀다.
어느 날, 형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여자가 찾아와 형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었는지 묻는다. '나'는 형이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지내는 모습을 떠올리며, 형의 죽음에 대해 자살 가능성을 의심하고 그에 대한 확증을 찾고자 한다.
형이 시간을 의심하고 죽음에 저항감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형의 죽음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형을 사랑한 여인을 통해 형의 삶과 죽음이 다시금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인과 '나'는 형의 죽음을 통해 서로 연결되며, 고통 속에서 맺어진 관계와 형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여인은 해마다 형을 만난 날에 눈이 온다고 이야기하며, 둘 사이에 깊은 감정이 싹튼다.
'나'는 형의 죽음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고통을 감내하며, 그녀와 함께하는 '우리들'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를 통해 형의 삶과 고통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그녀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치유할 길을 모색한다.
단편소설「대설부」에 나타난 기본적인 주제 역시 단편집 <사월의 끝>에서 보인 바와 같은 죽음의 시간과 그것을 초월하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 작품 가운데서 주인공이 죽은 형의 애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이 사랑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젊은 건축가였던 그의 형이 현장에서 실족하여 수술을 받다가 죽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을 강렬하게 의식하게 된다.
(전략) 기다릴 것도 없는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에 앉아 있었다. 불나비가 날아드는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에는 장마가 갠 후 아침처럼 차갑게 빛나는 가로등 사이로 차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밖의 소음들은 들리지 않았다. 이 정적이 방음이 된 유리문 때문이기보다는 실내의 밝음과 거리의 불빛 사이에 두텁게 내려진 어둠 속에 모든 소리들이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저 어둠 속에 내던져지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내가 아닐까. - 본문에서
♣
(전략)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니, 처음에 모든 것이 견디기 어려웠어요. 지나간 일들이 캄캄하게 헝클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 어떤 허위가 보이는 듯했어요. 모든 것은 서로가 공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랬는데……얼마 전부터 그분과 지낸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온 몸 구석구석에서 빛나는 보석처럼 지난 일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르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분은 또 하나의 저일 수도 있거든요.” - 본문에서
열차에서 내린 그녀가 여미어 쓴 스카프가 그녀 머리 위로 내리는 죽음의 눈을 막아 주듯이 그녀의 사랑이 형을 망각의 시간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사실은 주인공에게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이 작품「대설부」에서는 눈이 내리는 자연적 정황을 배경으로 하고 형의 죽음을 매개로 하여 '나'와 형의 연인이었던 여자가 '우리'가 되는, 사랑의 확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시간'의 흐름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수산 소설의 존재론적 사랑의 역학은, 리얼리즘이 풍미하던 1980년대 소설 문단에서 새로운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수산 필화사건(韓水山筆禍事件)】
1981년 5월 [중앙일보]에 1년간 연재 중이던 소설가 한수산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관련자들이 연행되어 고초를 치른 사건이다. ‘욕망의 거리 필화사건’이라고도 한다.
<욕망의 거리>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을 통속적으로 묘사한 전형적인 대중 소설이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군인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에 대한 묘사가 대통령 전두환을 비롯한 당시 제5공화국의 최고위층을 모독하는 동시에 군부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작가 한수산과 문화부장 정규웅 등 중앙일보사의 관계자들, 한수산의 문단 동료인 시인 박정만이 국군보안사령부(사령관 노태우)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다. 국내에서의 창작 작업에 회의를 느낀 한수산은 이후 일본으로 떠나 수년간 머물렀고,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8년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당대에는 언론 통제로 인하여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연재 중인 소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지엽적 표현을 독재 정권의 자격지심 때문에 억지로 문제 삼아 비인간적 결과를 낳은 필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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