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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청준 장편소설 『자유의 문』

by 언덕에서 2023. 11. 22.

 

이청준 장편소설 『자유의 문』

 

 

 

이청준(李淸俊. 1939∼2008)의 장편소설로 1989년 발표되었다. 「자유의 문」은 추리소설적인 구성에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어 소설을 읽는 재미와 함께 소설의 독서를 통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이 소설 속에서 저자는 액자소설의 양식을 통해 부도덕하고 타락한 세계의 실상을 비춰줌과 동시에, 이러한 세계에 대한 구원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은 이질적인 두 공간을 구별짓는 경계이자 두 공간을 이어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이 문을 경계로 세상은 세속과 초월의 공간, 절망의 순간과 영원의 시간대로 나뉜다. 「자유의 문은 이 경계를 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인물들은 대부분 이 경계의 문턱에서 좌절한다. 현실과 이상과의 숙명적인 거리감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 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문턱에서 좌절을 통해 자신들이 넘어서고자 했던 추악한 현실이 바로 영원과 구원의 공간임을 확인한다.

 

이청준 ( 李淸俊 .1939 - 2008)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가 주영훈(본명 주영섭)이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는 백상도 노인(본명 정완규)을 찾아 산을 오르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영훈은 자신의 작품 취재를 위해 당시 사건들과 관련 있는 경찰이나 언론사 기자가 아닌 지리산에 은거한 백상도를 찾아간다. 주영훈은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경험한 일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고, 백상도는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오직 신의 뜻을 행하라’는 종교적 계율을 지키기 위해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젊은 작가 주영훈은 수년 전 일어났던 강도사건과 자살 사건의 뒤를 쫓다가 실종돼 버린 기자와 형사의 행적을 좇아 노인을 찾아왔다. 입산 초기 주영훈을 외부인으로 경계했던 백상도가 점점 그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는 등 심경과 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계기로 수십 년에 걸친 다양한 인간관계를 털어놓는다.

 강도사건의 범인 최병진(본명 최홍진)과 항만조합사건의 자살자 유민혁(본명 유종혁), 그리고 백상도 이들 셋 모두 과거 <요한신학교> 출신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 신학교에는 당시 신앙심이 투철한 특정 학생들로 구성된 비밀단체가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단체의 조직원들은 성서 연구와 복음 전파가 아닌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을 증명하는 것을 주요 계율로 삼고 급진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을 실천해 왔다. 더욱이 백상도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마을 공동체에 의해 그의 가족이 몰살당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제정신을 잃은 사람들의 맹목과 무지, 증오와 질투, 잔혹한 폭력으로 얼룩진 전체이념에 대한 강한 회의와 삶에 대한 극도의 허무감에 사로잡힌 채로 살아왔다.
 이 때문에 백상도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정완규로 살면서 간청사업장, 차부의 검표원, 탄광촌을 전전하며 세계의 구원자로서의 삶을 자처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되고 종국에는 자기 기도를 위한 행보로 지리산행을 택한다. 채밀 작업을 하던 중 발견한 한국전쟁 당시 죽은 유골을 발견하고 토분을 만들어주는 그의 행위는 자신을 증거하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과 어길 수 없는 계율과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런 백상도와 그의 “믿음과 교리와 계율에 대한 미망”과 “무섭고 절망적인 외로움”을 지적하며 그를 설득하고 회유하는 주영훈의 갑론을박이 심해진다. 주영훈은 노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종교적 계율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노인에 의해 그 역시 살해돼 사라지고 만다. 결국 백상도가 설계한 벌집으로 인해 작가 주영훈은 앞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종 상태의 죽음을 맞는다.  

 

 

 이청준이 1989년 발표한 이 장편소설은 1978년 처음 썼던 원고를 두 번 고쳤다가 1988년 11월부터 1989년 4월까지 다시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집필 기간 동안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기관지가 상해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는 종교는 그 신앙적 진실을 지켜나가기 위해 실천적 계율을 마련하고 철저한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종교의 목적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세워진 계율이 절대화되면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신앙 자체를 속박하는 굴레로서 해악을 끼치게 된다. 종교뿐만 아니라 어떤 신념 체계도 극단적인 절대화의 길을 걸을 때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모순에 빠지는 운명을 맞는다. 장편소설 「자유의 문」은 바로 계율의 절대화가 빚어내는 폐해를 그린 작품으로 ‘정신의 경화 현상으로 나타난 계율주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명제는 ‘실천선(實踐善)’과 ‘절대선(絶對善)’이다. ‘실천선’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실천으로 드러내 증거하는 것으로 말씀의 전파가 아닌 말씀의 실천 과정에 참뜻이 있다고 설명된다. 또 사랑의 드러냄과 실천을 행하되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숨어서 일하다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게 ‘절대선’의 길로 규정된다. 추리 기법의 소설 「자유의 문」은 ‘절대선’을 엄격히 지키느라 인간에 대한 참사랑을 망각하고 살인을 서슴지 않는 계율주의자와 그를 추적하여 종교의 참뜻을 깨우쳐 주려는 추리작가의 대결을 매개로 펼쳐진다.

 이 작품에서 주영훈은 수단에 불과한 계율에 매달려 본질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며, 계율주의를 통박하던 주영훈이 죽음을 맞고 계율주의자도 스스로 패배했음을 느낀다는 결말을 보이고 있다.  작중 ‘소설과 삶을 동일시’하는 주영훈의 태도도 소설의 ‘실천선’에 얽매였다고 할 수 있다. ‘절대선’이든 ‘실천선’이든 극단적 계율주의는 파멸할 수박에 없다.

 이청준은 이 작품에서 양극단의 파멸을 보여 주면서도 명확한 해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지배적인 질서나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검증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에 짓눌린 사람들의 사고를 풀어주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이 구원을 위해 만들어낸 것 중에 종교와 문학이 있다고 한다. 종교가 절대적인 신의 존재와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인간을 모든 욕망에서 해방시킨다면 문학은 인간이 현실 속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를 끊임없이 제시함으로써 인간을 선(善)의 길로 이끈다.

 그러나 「자유의 문」은 어느 쪽의 방법을 택하든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는 그 속성상 어느 단계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절대화된다. 이 단계에 이른 종교는 이미 인간의 구원이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인간을 오히려 계율로 얽어매게 된다. 문학도 현실의 지평 너머 좀 더 좋은 세계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매몰돼 버리면 그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끊임없는 자기 검증이 필요한데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신감과 믿음이 지나쳐 검증 자체를 거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청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이처럼 극단으로만 치닫는 세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후술했다. 작가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는 이 작품에서 문학과 종교를 다루고 있지만 문학과 종교에만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논리의 함정에 빠져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극단에 빠진 종교인과 작가의 비극적 종말을 통해 이 사회 전반의 경직성과 집단 이데올로기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문학산책> : 이청준(동아일보. 1989. 11. 13) -

 

 “이번 작품 속의 인물들은 집단이나 자신의 신념이 요구하는 가치관에 빠져 파멸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집단의 가치관에 동의하고 난 후라도 끊임없는 자기 검증을 통해 자신의 길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내 가슴에 자유인의 초상으로 남아있는 우리 친척 어른 두 분과 마을 어른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습니다. 이들 중 한 분인 나의 외종형은 6․25 전쟁 중 가족이 몰살당하는 와중에서 혼자서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염소 한 마리를 끌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당시의 시대가 요구했던 복수와 증오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분 자신도 가족을 죽인 사람이 말할 수 없이 미웠겠지만 그분은 그 모든 감정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재하는 자신의 외종형 같은 인물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같은 인물들이 훨씬 더 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사회든 처음에는 그 구성원들의 좀더 행복한 삶을 위하여 계율과 질서를 만들지만 그 질서를 추종하는 세력이 많아질수록 이에 저항하려는 개인에게 훨씬 더 큰 압력이 가해짐을 알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들은 언제나 한번쯤 의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획일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의심을 하고 나서는 사람에 대해 오히려 경계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는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 개인은 또 다른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 것보다도 문학이 자기 역할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문학은 좀더 나은 세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예언적 기능을 갖습니다. 따라서 작가는 주변의 상황을 해석하고 추상화해서 독자들에게 그 가치를 선택적으로 내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독자는 자신의 생각보다 앞선 어떤 것을 보기 위해 책을 읽기 때문이지요. 문학이 현실과 지나치게 밀착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