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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조로아스터(Zoroaster)교와 마니(摩尼. Manichaeism)교의 관계

by 언덕에서 2023. 10. 12.

 

조로아스터(Zoroaster)교와 마니(摩尼. Manichaeism)교의 관계

 

 

 

마니교 벽화

 

 

마니교(Manichaeism)는 페르시아 사산제국의 예언자 마니라는 사람이 창시한  페르시아(이란) 계통의 종교이다. 사산 제국(226~651) 시대의 주요 주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이며 현존하지 않는 고대 종교다. 마니교 창시자 마니(Mani, 216∼276)는 바빌로니아 남부 출생으로 Manes, Manichaeus라고도 한다. 하마단의 원주민으로 세례와 금욕을 행하는 종교공동체에 헌신하고 있었던 아버지 파테크와 파르티아 왕가(224에 전복)와 관계가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저작과 마니교의 전설에 담겨 있는데 그는 출생지에서 자랐고 아람어를 사용했다. 12세 때 환상에서 본 천사로부터 새로운 종교를 전하라는 명을 받고 246년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의 구세론을 결합한 신종교를 창시하여 인도·중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교의를 설교하고 스스로 세계 최후의 예언자로 자처하였다.

 

기독교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교인 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마니교 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도로서 10여년을 머무르기도 하는 등, 마니교를 지지하여 실질적으로 기독교  보편교회 의 신앙을 거부한 적이 있다.

 

 마니는 소년과 청년 시절, 환상 속에서 2차례 '트윈'이라는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가 2번째 나타났을 때 그에게 새 종교를 전파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그가 신드와 투란으로 추정되는 인도로 가서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자, 새로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른 샤푸르 1세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페르시아 제국에서 마니교를 전도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파르티아왕국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 뒤 등극한 사산왕조의 샤푸르 1세(재위 242-273) 형제를 개종시키고, 그들의 비호를 받아 마니교가 널리 퍼졌다. 마니교의 확산과 성공은 다른 종교에게는 위협이었다. 그 결과, 헬레니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불교 문화권에서 큰 박해를 받았다. 마니는 바흐람 1세 때 조로아스터교도의 박해를 받아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소생의 보배> <거인의 책> <비밀의 책> 등의 저서는 페르시아어·시리아어로 썼으나 단편만이 전해 내려온다.

 그 시기의 마니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페르시아 제국의 서부지역(지금의 이란)을 두루 돌아다닌 것으로 보이며 북동지역도 방문했다는 후대의 전설은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바람 1세가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기간에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승려에게 공격을 받아 군데스하푸르(벨라페트)에서 왕의 명령으로 투옥되어 26일 동안 재판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마니는 세계를 정신과 물질의 혼합체로 보는 이원론과 선악의 대립원리를 독창적으로 주장했다.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

 

 

 

 마니교는 3세기에 페르시아왕국의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고유의 종교로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에서 파생되고,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로서, 교조(敎祖) 마니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불렀다. 마니에 관한 사실(史實)은 불확실한 점이 많으나, 일찍이 조로아스터교에 귀의하여 신의 계시를 받고, 30세 때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한 후,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깨달은 바를 전파,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분파하였다.

 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융성하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세계 종교들 중의 하나였다. 마니교는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마니교 사찰과 경전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마니교가 비교적 빨리 사라졌지만 동양의 경우 중국의 남부에서는 14세기 이후에야 최종적으로 사라졌다. 이는 네스토리우스교(景敎)나 동방 정교회(Church of the East) 가 중국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시대로 원나라 즉, 몽골 제국이 붕괴된 뒤, 제국의 중추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유목 집단은 서쪽에서는 이슬람과 터키계 언어를 수용하여 튀르크(터키인)을 자칭하게 되고, 동방에서 티벳 불교를 믿어서 몽골어 계통의 언어를 유지한 몽골을 자칭하는 세력과 몽골의 다른 부족 오이라트 세력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며, 네스토리우스교와 마니교 등 서역 종교를 믿는 유목 집단은 소멸하고 말았다. 

 

마니교의 사제들이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nbsp; 타림 분지 의&nbsp; 고창 에서 발견된 사본의 한 페이지

 

 마니는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받고 화형을 당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즉 <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서한>(교훈집) <거인의 책> 등이 마니교의 성전이 되었는데, 14세기 마니교 소멸 후에 없어져 그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20세기에 와서 유럽 학자가 그 사본을 발견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마니교에는 간명한 교의와 예배 양식, 엄격한 도덕계율이 있었다. 그 교의는 광명·선과 암흑·악의 이원론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현실세계는 명·암이 혼돈되어 있으나 멀지 않아 광명의 세계가 예정되어 있고, 그 예언자이며 지상의 구제자로서 마니가 파견되었다고 말한다.

 마니교도에게는 각자 속에 내재하는 광명의 소인(素因)을 기르기 위한 엄한 계율이 요구되었다. 육식과 음주를 엄금하고, 악행을 삼가며, 정욕을 멀리하여야만 했다. 마니교는 당시 교세가 급격히 발전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와 로마제국에까지 확장되고, 다시 인도·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13-14세기에 쇠퇴, 소멸하였다. 그러나 마니교는 동서 양세계를 문화적·종교적으로 결부시키는 가교적 역할을 한 공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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