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단편소설 『쥘부채』
언론인·소설가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단편소설로 1969년 월간 [세대]에 발표되었다. 이병주가 지닌 작가적 상상력과 감수성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민족의 비극이었던 6ㆍ25 전쟁과 분단의 아픔과 사회적 상황이 한 쌍 연인의 삶을 통해 애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비상조치법 위반으로 형무소에 갇힌 두 남녀의 사랑, 부조리한 시대의 아픔, 당시 젊은이들의 고뇌와 방황 등이 '쥘부채'라는 작은 소품을 통해 한데 어우러진다.
단편소설 『쥘부채』의 중심 이야기는 프랑스 희곡 읽기 스터디그룹에 참여한 유 선생, 주인공 동식, A, B, C 등의 학우가 여러 차례 빚어내는 대화와 토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설악산 등반 조난사고, 죽음의 방법, 공산당, 정치, ☞간첩 이수근 사건, 개헌 논의, 신, 치욕의 청춘, 케네디 대통령 저격 사건 등과 같이 당대의 사건에서 초 시대적인 철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마의 대화가 오간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이들 사이의 대화가 보여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은 소설이 발표되었을 그 시대가 표현의 자유가 냉전체제의 그늘 속에서 지극히 제약당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상대방 연인과 이념을 위해 죽는 날까지 사랑을 버리지 않은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은 한국 현대 소설 가운데 보기 드문 사상적 러브스토리라고 해야 할 듯하다. 줄거리 자체가 '우연'과 개연성에 의존하는 단점이 있지만 작가가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이나 주제 및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면이 있다는 판단할 수밖에 없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생인 동식은 설악산에 겨울 등반 간 남녀 10명이 조난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동식에게는 3년 연상의 대학원생 애인이 있었으나 그녀는 동식에게 처녀성을 안겨주고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런 동식이 우연히 길에서 조그마한 쥘부채 하나를 주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음날 동식은 서대문 교도소 근처에서 ‘교도 작품’이라는 간판이 붙은 전시장을 발견한다. 그곳은 죄수들, 특히 장기수(長期囚)들이 만든 공예품을 전시한 장소다. 그곳을 관리하는 형무관은 칫솔로 만든 5㎝ 크기의 여자 나신 조각품을 보여주며 장기수들이 수작업을 통해 정교하고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고 알려준다.
동식은 전날 자신이 습득한 쥘부채 또한 장기수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쥘부채 안에 새겨진 나비의 날개에서 깨알같이 쓰인 ㄱ, ㄷ, ㄱ이라는 세 개의 자음과 나리꽃의 술에 그려진 ㅅ, ㅁ, ㅅ이라는 세 개의 자음을 발견하고, 사람 이름의 이니셜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낸다. 이후 동식은 이승만 정권 때 사상범 강덕기가 처형당했고, 강덕기의 애인 신명숙은 비상조치법 위반으로 무기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기수의 삶에 관심이 생긴 동식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며 형무관에게 얼마 전 석방된 장기수 몇 명의 주소를 부탁한다. 형무관은 전날 병사한 여수(女囚)의 시체가 가족에게 인도되었다며 쪽지를 전해준다. 그런데 쪽지의 사망자 이름은 신명숙이다. 신명숙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20년 형으로 감형되었으나 17년째 형을 살던 해에 병사(病死)하면서 강덕기를 향한 사랑의 표시로 쥘부채를 만들어 유품으로 남겨놓았는데 그게 어쩌다 동식에게 전해진 것이다. 동식은 그 주소의 산동네를 찾는데, 마침 신명숙이 살던 집에서는 무당이 주관한, 신명숙과 묘령 남자의 영혼결혼식이 열리려던 참이다. 강덕기의 친형이 그것을 만류하며 신명숙의 이모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동식은 신명숙의 이모에게 신명숙과 강덕기의 절절한 사연이 담긴 쥘부채를 보여주며 신명숙과 생면부지의 남자 간의 영혼결혼식이 열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데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식은 그날 새벽 부채가 길에 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줍지 않았더라도 영혼끼리의 결혼식이나마 어색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사람의 집념은 기필코 기적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후 동식은 관계기관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게 되나 소설을 쓰기 위해 신명숙이 살던 집을 방문한, 순수한 동기를 인정받아 훈방된다. 청명한 날 동식은 단신으로 안산에 오른다. 강덕기가 처형당하고 신명숙이 17년 청춘을 묻은 서대문 교도소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동식은 쥘부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다.
작품의 배경은 1960년대이다. 작중 관찰자와 해설자 그리고 해결사의 역할까지 맡은 주인공 동식은 신명숙이 칫솔대를 갖고 나비와 나리꽃 모양을 중심으로 여러 모양을 정교하게 빚어내 만든 쥘부채를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명숙이 목숨을 바쳐 사랑한 남자 강덕기는 신명숙 이모가 “그놈이 우리 명숙이를 꾀어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다가 붙들려서 저는 죽고 명숙이에게 무기징역을 받게 했는데 명숙이가 그놈을 사랑해? (218쪽)'과 같이 내뱉는 욕설을 통해 간신히 형상되고 있는 정도다.
쥘부채는 누가 만들었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한 주인공 동식의 노력으로 두 남녀가 겨우 형상화되고 있는 만큼, 소설 『쥘부채』의 진정한 주인공 자리는 동식이 당연히 차지한다. 그러나 강덕기와 신명숙이 빚어낸 사랑 이야기가 비록 뼈만 남았다 하더라도 두 남녀가 이병주의 초기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삶의 내용을 지닌 점은 분명하다.
단편소설 『쥘부채』에서는 동식이란 인물만이 작가 이병주의 반영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식과 그의 친구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전력이 있는 유 선생도 작가 이병주의 분신에 해당한다. 동식으로부터 쥘부채 사건만을 뺀 신명숙의 사연을 들은 유 선생은 김일성으로부터 미제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되어 사형당한 박헌영의 경우를 예시하면서 "태백산에서, 지리산에서 대한민국의 역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김일성 도당으로부터 미국 간첩의 앞잡이 취급받았으니 불쌍한 건 그들이다. 자네가 말한 신명숙이라는 여자도 그 불쌍한 망자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199쪽)라고 하여 남로당이라든가 빨치산의 비극성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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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쥘부채』는 액자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주요 인물들을 일정한 사상의 포회자로 그려낸 점에서 이데올로그 소설에 속한다. 동시에 동식과 세 친구 사이의 토론성 짙은 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서 '대화 소설'에 들어간다. 그런가 하면 비록 간단히 처리되긴 했지만, 동식을 포함한 두 남녀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 점에서 '사랑 소설'에 속한다.
『쥘부채』는 주인공 동식이 안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쥘부채를 태워버리고 강덕기와 신명숙의 사랑을 향한 집념이 계속 살아있기를 기원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지혜의 시간”인 석양 녘의 분위기를 음미하는 것으로 소설의 마지막 사건을 설정하였다. 작가는 동식의 이런 모습을 자라투스트라를 닮아 고고하다고 예찬하면서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 같다. 자신을 더럽힘 없이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모름지기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와 같은 니체의 철학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소설의 끝을 맺었다.
니체의 아포리즘을 중심으로 하여 시적 표현으로 끝맺음을 한 태도에서 작가 이병주의 창작 의도가 특정 인물이나 이념의 절대 긍정과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는 이병주는 주관이 강한 작가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수근(李穗根) 위장 귀순 사건 :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은 1967년 3월 판문점에서 북한 경비병의 총격 뚫고 극적 귀순했다. 이수근은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등의 비인격적 대우와 감시에 남한 체제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껴 1969년 1월 변장하고 탈출했다가 월남에서 체포, 그해 7월에 처형되었다. 이수근에게 위조여권 만들어 줬던 배경옥 씨는 21년간 복역했다. 2006년 과거사委는 진상규명을 결정, 2008년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이후 간첩의 대명사 이수근은 사형집행 4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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