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이ㆍ노랑이'의 어원
아무리 ‘빨강이’가 옳은 표기라 하더라도 ‘적색분자’를 낮추어 이르면서의 ‘빨갱이’를 ‘빨강이’로 쓴다면, 조금쯤은 낯설게 느껴지리라. 이른바 ‘ㅣ모음역행동화’ 때문에 ‘이’의 영향을 받아 ‘ㅏ’가 ‘ㅐ’로 되는 것인데, ‘빨강이’ 하면 다른 말과 같이 느껴지면서 사실 김이 빠진다.
그러나 ‘빨강이’가 적색분자요, ‘빨갱이’는 꽃게소경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를 이른다. 이 고기가 붉으면서도 누르스름한 색채가 잇는 모양인데, 사상이 의심스러운 고기인지까지는 모른다.
해방 후에 생긴 말이다. 6ㆍ25를 전후해서는 또 ‘적구(赤狗)’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것은 뜻을 새기자면, ‘붉은 개’여서, 표현 자체가 좀 야하단 느낌이 드는 데 비긴다면, ‘빨강이’는 ‘빨강’에 ‘이’가 붙어 야하지 않게 낮추어 쓸 수 있는 말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빨갱이’한테 형을 잃은 C형은 '빨갱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뻘켕이'라고 부른다. '뻘겡이'를 더 거세게 발음한 것이려니와, ‘빨갱이’ 정도로는 직성이 안 풀렸던 것이리라. ‘빨갱이’야 물론 저들이 빨간 빛깔로 표시되는 점이 있어서의 이름이겠지만, 우리말에는 이와 같은 것으로 감장이ㆍ깜장이ㆍ검정이ㆍ껌정이ㆍ파랑이ㆍ퍼렁이ㆍ노랑이ㆍ누렁이ㆍ발강이ㆍ빨강이ㆍ벌겅이ㆍ뻘겅이…… 같이 그 빛깔의 물건을 나타내는 말들이 있다. 하양이 같은 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른 말은 그만두고라도 ‘노랑이’가 조금쯤 말거리가 된다. 지난날에는, 요새 같으면 ‘황구 보신탕’감이 되는 누런 빛깔을 띤(사실은 다갈색 쪽에 가깝지만) 똥개에 곧잘 ‘노랑이’란 이름이 붙었던 것인데, 그 ‘노랑이’가 ‘빨강이 → 빨갱이’ 같이 ‘노랭이’로 발음되면서는, 사전의 해석을 빌면, ‘규모가 좁고 인색한 사람’을 이르게 되었다.
황금의 빛깔이 노랗다. 그 황금만 쫓다보니, 황금에게 인간을 먹혀버린 꼴이 된 것이다. 온통 인간이 노랗게 되어 ‘노랭이’이니, 그 옛날 황금에 걸신이 든 왕이, 손에 잡는 것마다 황금이 되어 마침내는 자기 딸까지도 황금이 되어버리더라는, 그런 인간성 잃은 인간이 곧 ‘노랭이’인 것이다. 영어에서도 채광자(採鑛者)만이 'gold digger'가 아니라, 속어로는 남자를 홀려서 돈을 빨아먹는 여자를 이르니, 노랭이는 인간의 살갗을 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노란 빛깔을 띤 물건’일 뿐이다.
“야 임마, 노랭이 짓 작작해. 그거 거머쥐고 묘 속으로 갈 줄 알고 그러는 거냐?”
그래도 역시 ‘노랭이’의 웃음은 노랄 뿐이다. ‘노랭이’에서는 한 걸음 더 내친 표현들이 있다.
“그 자식 금이야.”
“아니, 24금이지.”
‘노랭이’는 금(金)의 순도 문제에까지 끼어들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18금 노랭이’보다 ‘24금 노랭이’쪽이 한 술 더 뜨는 ‘노랭이’가 아니겠는가. ‘노랭이’에 비기면 ‘구두쇠’는 인간의 빛깔까지 노랗게 변한 쪽은 아님을 이르는 것으로 구별되는 모양이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