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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쌀’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11. 30.

 

‘쌀’의 어원

 

 

 쌀은 반드시 벼 껍질을 벗겨놓은 그 하얀 알맹이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쌀은 양식 모두를 이른다. 그래서 쌀은 그것이 도정을 한 곡식이면 어디에고 붙게 되는 이름이다. 입쌀ㆍ보리쌀ㆍ좁쌀ㆍ멥쌀ㆍ숩쌀(술쌀)ㆍ햅쌀…… 같이 곧 먹게 되어 있는 양식일반을 가리키고 있다.

 재미있는 현상이 이 쌀 이름들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모두 ‘∼ㅂ쌀’로 되어 ‘ㅂ’ 자가 끼어 들어가 있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어를 뒤져보면, 지금의 ‘쌀’의 ‘ㅆ’이 ㅂ과 ㅅ의 합용병서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훈몽자회>를 떠들어볼 때 이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는데, ‘메(뫼) 벼’에서 나오는 쌀이 곧 ‘멥쌀(묍쌀)’, ‘찰벼’에서 나오는 쌀이 곧 ‘찹쌀’이었으니, ‘메지다’는 ‘메에 쌀이 붙은 ‘메쌀이요, 차지다는 '차'에 '쌀'이 붙은 '차쌀'이었다.

 지금은 그런 발음이 없어졌다고는 해도 지난날엔 입을 먼저 오므려 닫은 다음 ‘살’이라고 하는 발음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ㅂ’ 발음을 한 상태에서 가볍게 ‘살’이라고 했던 발음이 오늘날의 말 ‘쌀’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ㅁ’이나 ‘ㅂ’ 같이 입술과 관계되는 형태의 발음을 먼저 하고, 이어서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좀 더 원초적인 발음 형태 아닌가 생각된 일이 있었다.

 이를테면 ‘씨(種)’도 그런 발음이었던 양, 중세어만 해도 ‘ㅂ’과 ‘ㅅ’의 병서 표기가 나오는 것인데, 영어에서의 오늘날엔 발음도 안 된 채 글자로만 남아있는, 'P'로 시작된 낱말들도 그러한 형태의 발음으로 시작되었더란 흔적만을 남기는 것이리라 할 것이다. psalm, psychology 같은 낱말들이 우리의 ‘쌀’과 같은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그 p가 발음되었던 것이겠지만, 후세에 이르러 거의 스러진 것은 knife, knight 같은 k의 경우와도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처음에 ‘원초적 발음 형태’라는 말을 했는데, 예를 들면 아프리카 서부의 공화국 가나의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의 성에 Nkruma로 표기되는 것이 있었다. 이 괴상한 로마자 때문에 처음에 국내 신문들은 ‘느크루마’라 하기도 하고 ‘엥크루마’라 하기도 하고 ‘엔크루마’라 하기도 하다가 나중엔 ‘응크루마’라 하기도 했던 것인데, 이 역시 ‘ㄴ’을 먼저 발음하고 이어 ‘ㅋ’ 발음을 하게 되는 그런 현상 때문에 생겨났던 표기 아니었겠나 생각하면서. 아프리카 쪽엔 아직 그렇게 발음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것이로구나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쌀’의 발음에서 이상하게도 어떤 발음을 끼고 다니는 낱말들의 떼죽이 있다. ‘암(雌)’ㆍ수(雄)‘가 그런 것이다. 이건 'ㅎ' 음을 끼고 다닌다. 그래서 그냥 '수놈'이라 해야 옳을 것을 ‘숱놈―순놈’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ㅎ’을 끼고 다니기 때문에 '암캐―수캐', '암탉―수탉', '암쾡이―수쾡이', '암퇘지―수퇘지', '암톨쩌귀―수톨쩌귀', ‘암펄―수펄’, '암펌―수펌', '암평아리―수평아리', ‘암피둘기―수피둘기’, '암꿩―수퀑' 같이 들은 것도 같고 안 들은 것 같기도 한 말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경상도 쪽에서는 ‘쌀’이라 하지 않고 ‘살’이라고 지금도 발음하고 있는 것을 본다. 경상도 아닌 다른 지방에서도 ㅂ 발음을 한 다음 가볍게 ‘살’이라고 하던 것이 차츰 된소리로 되어갔던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살’이야말로 우리의 옛말에서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본딧말을 이루었던 것이리라 생각되고 있으니, '살다'나 '살(肉)'이 이 '살'에서 출발되고, ‘솔(松)’은 국토의 '살'이었으며, 거기에서 '사리'ㆍ'소리'ㆍ'수리'ㆍ‘소라’ㆍ‘사라’ 따위 음이나 뜻으로 번져 지명으로도 뻗쳐 나갔던 것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