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뿔’의 어원
‘감기’라는 말은 알아도, 혹은 ‘인플루엔자(influenza)’라는 말은 알아도, 혹은 영어니 프랑스어의 ‘그립(grippe)이라는 말까지 안다 하더라도, 자칫 '고뿔'이란 말은 모를 수가 있다. 안 쓰기 때문이다.
‘고뿔도 남 안 준다.’는 속담은, 지독하게도 재물을 아끼는 경우를 두고 이름이며,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속담은 남의 큰 위험이나 걱정보다 내 작은 걱정이 더 잘박하게 느껴짐을 이름이며, ‘정승 될 아이는 고뿔도 안 한다.’는 속담은 크게 될 아이는 남다른 데가 있음을 뜻하는 것인데, 이때 쓰인 ‘고뿔’이란 말이 요샛말로는 감기이다.
고뿔도 아삼아삼한 판인데, ‘개×머리’, ‘개×부리’ 혹은 ‘개좆불’(위에서의 ×자는 ‘조’자 아래에 ㅈ자 한 글자임) 하는 소리는 아예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욕 냄새가 나서 어감까지 좋지 않으니 굳이 현실적으로 써야 할 말이라고 권장하고 싶은 뜻은 없지만,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외조모가 쓰던 말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다만 그때는 ‘×’으로 발음하지 않고 ‘짐’으로 발음해서 필자는 ‘개짐머리’로 들었던 것인데, 그 ‘×’자 발음하기가 거북해서 ‘짐’으로 짐짓 바꾸어 말했던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그러한 예로 저작(詛嚼)한다는 뜻의 ‘씹다’도 필자는 ‘씹다’로 배우지 않고, ‘쌉다’로 배워서, ‘악아, 얹히지 않게 잘 쌉아 먹어라.’고 이르시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 ‘씨’자에 ‘ㅂ’한 자의 어감도 결코 전기한 ‘×’자에 내리지 않게 고약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처칠 수상이 갑자기 고뿔에 걸렀었다. 그 당시 나치스의 ‘blitz·krieg(전격전)’에 빗대어 ‘브릴츠플루(blitzflu)’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금세기에 들어서의 유명한 유행성감기로 1889년∼1800년의 ‘러시언 인플루엔자’, 1918년∼1919년의 ‘스페니쉬 인플루엔자’, 1957∼1958년의 ‘아시언 인플루엔자’ 같은 것이 곧잘 거론되기도 한다.
고뿔에는 그냥 감기도 있지만, 유행성 감기도 있고, 또 근자에 이르러서는 인명을 해치는 데까지 이르는 독감이라는 것까지가 유행해서, 지난 겨울에도 일본에 그것이 퍼진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나라 방역진의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었다. 대체로 그 자체는 그런대로 견뎌낼 만한 것이지만, 그 병의 정체가 안 밝혀진 것과 함께 폐렴 따위 병발증(竝發證)이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고뿔이라는 아름은 그것을 앓게 되는 증세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중세어로 ‘고뿔’은 ‘곳블’이었는데, 그것은 ‘고’와 ‘블’로 이루어져 있는 낱말임을 알 수 있으며, ‘고’는 현대어의 ‘코’요, ‘블’은 현대어의 ‘불’이니, ‘곳블’은 곧 ‘콧불’, 코에서 불 같은 열기가 풍긴다는 데서의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블’은 또 풀(膠)을 이르기도 했던 것을 보면, 감기가 걸렸을 때 노상 그 풀과 같은 콧물을 흘려야 했으며, 거기에서 온 ‘곳블’이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앞서 ‘개×부리’라는 속어가 있다고 했는데, 얼마나 성가시게 굴었으면 붙게 된 그 이름이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아무튼 고뿔은 반드시 겨울에만 걸리는 것도 아니어서, 건강관리를 잘못하면 여름에도 곧잘 훌쩍거리는 신세로 될 수 있었던 것에서 살펴, 그것에 안 걸릴 건강 체질을 평소부터 다져놔야 할 것 같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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