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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바둑'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11. 24.

 

'바둑'의 어원

 

 

 바둑을 두어 보면, 그 사람됨을 대체로 짐작할 만해진다. 욕심 많게 두는 사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 다 죽어 있는 돌에 대해 기어이 살려 보려고 미련을 두는 사람, 곧잘 포기해 버리는 사람, 이기고 지는 데 대범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공격형인 사람, 잔수에 밝은 사람, 그저 평화주의로 자기 영토만 확장해 가는 사람…… 거기에 두는 태도에 따라 인품이 그대로 그 판 위에 비치기도 한다.

 오늘날의 바둑은 일본이 그 대종 이루어 단수(段數)로 보거나 기사의 수로 보거나, 실력으로 보거나 일본을 따를 곳이 없어서, 그쪽의 기사들은 생활의 안정도 얻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유럽 쪽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361의 구멍 위에 펼쳐지는 지모와 계략의 싸움, 참으로 동양적인 것의 으뜸이라 할 만한 바둑인데, 중국 원 나라 때 나온 바둑의 성서인 <현현기경(玄玄碁經)>에는 기원전 2,350년께 요 임금이 그 아들 단주를 교훈하기 위해 만들어서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광박물지(廣博物誌)>에는 요 임금 아닌 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상균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해 냈다고 적고 있으나 근거 있는 이야기는 못 되고, 다만 <논어>에 공자께서,

 “바둑을 두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바둑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켜 주고 있다.

 그 바둑판도 처음엔 가로ㆍ세로가 17줄이었더라는 것인데, 당으로 내려오면서 19줄로 되었다는 것이 남송(南宋) 육상산(陸象山)의 <오잡저(五雜沮)> 말고도 그 후 북경 교외 왕실 분묘에서 발견된 한대(漢代)의 바둑판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바둑이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생각되는 것이, <산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에, ‘好圍棋投壺之戱’(바둑과 투호놀이를 즐긴다)는 기록이나, <후주서(後周書)> ‘백제전’에 ‘有投壺樗蒲等雜戱 然尤尙奕棊’(투호ㆍ저포 따위 놀이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바둑을 더 즐긴다)는 기록들에서도 살펴 그러하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간 것은, 백제와 교류가 있은 뒤, 즉 삼국시대 중기 이후가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바둑을 ‘혁(奕)’으로도 썼으나, 그것은 양자강 부근의 방언이었을 뿐, 원래는 ‘圍棋(위기)’라고 썼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排子(배자)’라는 글자로 ‘바둑’을 나타냈다. ‘排子’는 화점포석(花點布石)을 뜻하는데, 그것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또 다른 우리 고유의 화점포석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여기서의 ‘子’는 ‘돌’ 또는 ‘독’의 뜻을 가져 거기에 ‘排’를 합치면 ‘배돌ㆍ배독’이 되는 것인데, 세월이 흐르는 사시에 ‘배돌-바돌-바독-바둑’ 같이 되어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排子’라는 표기 시절에 벌써 ‘圍棋’라는 중국 표기에 대해 우리는 ‘배돌’ 같이 실제의 언어생활을 했던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주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가운데 <예성강곡 전편(禮成江曲前篇)>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전해오는 것을 본다. ‘昔有唐商賀頭綱 善棋…’로 그 내력이 시작된 <예성강곡>은 당 나라 장사치에게 바둑을 두어 미인 아내를 빼앗긴 끝에 부른 단장(斷腸)의 노래이니,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 좋아한 것을 이용하여 고구려에서 국수(國手)인 중 도림(道琳)을 보내 바둑을 두어 정사를 문란케 한 다음 마침내 웅진으로 천도케 한 따위 고사와 함께 바둑이 지니는 그 진진한 흥미를 방증케도 한다.

 공직에서 물러나 이젠 한적한 전원에서 자그만 과수원을 경영하는 선비에게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다. 더운 여름날, 남북으로 터진 마루에 앉아 냉수에 과일쪼가리를 쟁반에 담아놓은 채 벗고 앉아 바둑 두는 정경을 그려볼 수 있다.

 진정 동양적이라 할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