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가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 필리포바(Ве́ра Никола́евна Фи́гнер Фили́ппова)

러시아 혁명가 베라 피그네르(러시아어: Ве́ра Никола́евна Фи́гнер Фили́ппова: 1852-1942)는 1852년 러시아 귀족 가운데서도 명문의 딸로서 태어났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 박사과정을 거쳐 학위를 따기 직전에 의학을 포기하고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그것이 20세 때이니 무척 조숙한 여자이다.
베라가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바쿠닌과의 만남에 있었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주의, 특히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맹렬하게 공격한 사람이다. 권력에는 반드시 악이 따르는 법이며, 그 권력 악은 국가 악으로서 최대의 규모와 형태로 발현된다는 설에 베라는 감동하고 제정의 타도를 그녀의 인생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베라는 취리히 대학에서 바쿠닌의 사상에 관한 논쟁이 활발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명은 파괴되어야 한다’라고 바쿠닌의 지지자들은 선언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소수의 특권자에게만 봉사하고, 인민대중을 노예화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혁명운동에 투신한 베라는 가장 극렬한 테러리스트로 되어갔다. 그녀가 강행한 테러만 해도 수십 건을 헤아린다. 그 최대의 사건이 1881년 3월 1일에 있었던 알렉산더 2세 황제의 암살이다. 베라는 이 사건을 스스로 지도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민의지당'의 재건을 서둘다가 1883년 2월 10일에 드디어 체포되었다. 그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 알렉산더 3세는
“아아, 그 무서운 여자를 체포했단 말인가.”
하고 탄성을 올렸다고 한다.
베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른 혁명가들은 사형선고를 받곤 구명 탄원했는데, 그녀만은 구명 탄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형이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그녀는 21년 7개월 동안을 실리셀부르크의 요새 감옥에서 지나게 되었다. 이 감옥은 중범죄자들만 수용하는 감옥으로서 외부와의 통신은 완벽히 단절되어 있었다. 추위와 고독을 곁들인 극악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이 결핵과 영양실조의 희생이 되든가, 발광하든가 했는데 베라 피그네르는 굳건히 살아남았다. 32세에 투옥되었던 베라는 52세에 출옥하여 1940년 당시 88세의 나이로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라는
’생애의 전 기간을 통해 회한하고 나는 과거를 회고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라고 쓰고 있었다.

- 이병주 단편소설집 「우아한 집념」 84~5쪽 단편소설 <아무도 모르는 가을>에서 발췌
※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 필리포바는 카잔 출신으로, 러시아·독일 혼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피그네르는 인민의지당(人民意志黨) 지도부 중 한 명으로서,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사건을 계획하는 데 참여했다. 피그네르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20년간 유폐되었다가 유형에 처했다. 피그네르의 회고록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 혁명에 평생을 바친 희생자로서 떠받들어졌다. 소련 시절에 피그네르는 정치범 유형수 협회에서 활동하다 1942년 자연사했다. 향년 8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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