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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고뿌ㆍ컵’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9. 21.

 

‘고뿌ㆍ컵’의 어원

 

 

며칠만에 서는 장을 둘러보고 난 시골 영감님네는 어지간히 피곤하다. 오늘 아침에 예정했던 대로 장감도 다 보았다. 이때 이웃 마을 친구가 다가왔다.

 “다 봤는가?”

 “그래, 자네는?”

 “나도 다 봤네.”

 “그럼, 잘됐네. 우리 안성댁한테 가서 한 고뿌씩만 하고 가세.”

 이래서 그 안성댁이 경영하는 선술집으로 들어간다.

 “우리 소주 한 고뿌씩 주구료.”

 ‘소주 한 고뿌’가 시골 영감님네들의 현대용어이다. 현대교육을 받은 젊은 층에게는 생소한 말이지만, 시골 영감님들은 지금도 즐겨 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영감님들도 ‘소주 한 잔’ 마실 때 외는 별로 다른 곳에다는 쓰지 않는다. 물 ‘한 고뿌’ 먹기 위해 ‘고뿌’를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소주 한 고뿌가 소주 서너 고뿌씩이 되어 거나해진 기분으로, 나중에는 별로 멀지 않은 거리일 때는, 공동출자하여 택시를 타고 귀가하게쯤 된 영감님들이라는 것이 석유 파동 나기 전의 이야기인데, 지금은 ‘소주 서너 고뿌’까진 몰라도 택시 타고 들어가게는 어려울 것 아니겠나 생각되기도 한다.

 시골 영감님들이 ‘고뿌’라고 쓰는 것은 일본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말로 ‘コップ(곱푸)’라 하고, 그 ‘곱푸’가 ‘고뿌’로 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거기서 와음, 더러는 ‘고뽀’라고 말하는 영감님도 있다.)

 그 말도 옳다. 일본 사람들이 쓰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본말도 물론 외래어이다. 그 말은 포르투갈어의 ‘copo(코포)’에서 온 것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벌써 17세기에 네덜란드의 선교사가 그들 나라에 오면서 퍼뜨린 네덜란드어 ‘kop(코프)’에서 왔다는 설이 조금은 더 유력하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 그것을 정확하게 헤아리기란 어려운 법이다. 아무튼 그 ‘copo'나 ’kop'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을 우리는 나중에 받아들였다는 것으로는 되리라.

 이 ‘copo'나 ’kop'은 영어의 ‘cup(컵)’과 같은 출발을 보인다. 라틴어에서의 ‘cuppa(쿠파)’가 그 원류로 되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것이 여러 나라로 흘러들 때 음운상에 다소의 변화를 보인 것뿐이다.

 그렇다면 ‘고뿌’와 ‘컵’은 조상이 같은데, 우리의 실제 쓰임은 도시와 농촌의 말같이 구별되어 있다는 것으로 된다. 시골 영감님이 ‘소주 한 고뿌’지, 도시의 월급쟁이는 똑같은 소주를 놓고도 ‘소주 한 컵’이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온 ‘고뿌’는 농촌에서 살며 숨 쉬고 있고, 나중에 들어온 ‘컵’ 쪽은 도시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컵’은 ‘데이비스 컵’이네 ‘우승컵’처럼 쇠붙이의 이미지를 곁들여 있기도 하여, ‘고뿌’와는 이래저래 세대차를 느끼게 하기조차 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말이 많이 있다. ‘비어홀’에 들어가서 맥주 ‘컵’으로 ‘비르’를 따라 마시게 ‘ 되어 있어서 '비어'와 '맥주'와 '비르'가 공존하여 것이다. '비르'는 독일어 bier'에서 온 것이라 하지만, 18세기 중엽, 즉 일본의 에도막부(江戶幕府) 중엽에 벌써 일본에 들어왔더라는 기록이 있는 것과 함께 네덜란드어 ’bier'가 독일어보다 먼저라 말기기도 한다. 우리는 그보다 늦게 일본을 통해서 그걸 만들고 또 익히게 된 말이니, 간접 수입한 셈인데, 이 ‘비르’나 ‘비어’는 앞서의 ‘컵’ㆍ‘고뿌’처럼 각기 달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은 있다. 독일어의 ‘Gas(가스)’나 영어의 ‘Gas(개스)’, 미국말 ‘Documentary(다큐멘터리)’나 영어의 ‘Documentary(다큐멘터리)'가 표기는 다른 체 똑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과 같이.

 그러나 ‘고뿌 - 컵’ 같은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무’와 ‘검’이 그것이다. ‘고무’는 네덜란드어의 gom(곰)‘, 혹은 프랑스어의 gomme(곰)’에서 왔다고 생각되는데, 주로 ‘고무신’에다 이미지를 심었다. 어린이들이 쓰는 지우개를 ‘고무’라고도 했던 것인데, 지금은 거의 안 쓰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영어의 gum(검)‘은 듣기 싫게 딱딱 씹어대는 '추잉검'과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인데, '고무'가 먼저 쓰이고 '검'이 나중에 들어온 깐해서는 ‘고무’ 쪽이 더 강세에 있는 것 같다. ‘고무제품’이 대체로 ‘고무’로 되어서 고무다리ㆍ고무공ㆍ고무도장 같은 말이 있어 그렇다는 것인가. ‘고무’도 일본말 ‘ゴム(고무)’에서 온 것임을 밝히는데, gom이나 gomme(중세 영어도 철자가 이러했다)이나 gum이나 gummi(굼미) 쪽에 바탕을 둔 말들이었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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