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석 단편소설 『파경(破鏡)』
김이석(金利錫. 1914∼1964)의 단편소설로 1953년에 써서 1955년 [신태양]지 9월호에 발표한 작품으로, 전쟁을 통해 겪는 한 가정의 비극을 묘사하여 전쟁을 고발하고 있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와중에 수많은 남한 문인들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동경하여 이북으로 올라간 데 반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문인들도 있었다. 김이석은 월남한 문인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로 손꼽힌다.
1914년 7월 16일 평양에서 만석꾼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김이석은 1936년 연희전문 문과를 중퇴하고 평양에서 《단층》이라는 동인지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에 단편 <부어(腐魚)>가 동아일보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김이석이 《단층》의 창간 동인으로서 추구한 것은 의식의 흐름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적인 심리소설 미학이었다. 1937년 스물세 살의 그가 《단층》에 발표한 처녀작 「환등」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활용해 하룻밤 동안 주인공인 화자와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는 이중 구조로 엮인 심리 상태를 통해 억압적인 일제 식민지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때 그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1941년 명륜여자상업학교에 재직, 해방 후에는 칩거하다가 1951년 1ㆍ4 후퇴 때 월남, 종군작가로 활약하며, 1952년 전란 속에서 <실비명>과 <소녀 태숙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1953년 [문학예술] 편집위원, 성동고교 교사직에 있으면서 <악수> <분별> <춘한(春恨)> 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1956년 단편집 <실비명>을 발간하여 제4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1957년 <아름다운 행렬>을 조선일보에 연재할 무렵 가장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으나, 자취생활로 곳곳을 전전하는 등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해 창작에 전념할 수 없었다. 1958년 6월 소설가 박순녀와 재혼, 그 후 [민국일보]에 장편 <흑하(黑河)>를 연재하고, <지게부대> <흐름 속에서> 등 의욕적인 단편을 계속 발표했다. 후기 작품 활동은 주로 신문소설에 주력하여 1962년 [한국일보]에 장편 <난세비화(亂世飛花)>를 연재했고, 1964년 [대한일보]에 장편 <신홍길동전>을 일부 연재하다가 9월 18일 고혈압 증세를 일으켜 사망했다. 1957년 단편집 <실비명>으로 제4회 [자유문학상], 1965년 [서울시 문화상]을 추서 받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 교수의 외딸인 숙희는 은행원쯤 되는 성실한 청년의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6ㆍ25 전쟁으로 고아의 신세가 되어 부산에 피난 가서 양키들의 초상을 그려주는 환쟁이 황섭이와 결혼한다.
처음에는 정이 안 갔으나, 남편과 시어머니의 끔찍한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1년도 채 못 되어 섭이는 입대하고, 뒤이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과부는 구멍가게를 내어 서로 의지하고 사는 동안 시어머니가 과자 도붓군과 바람이 나자, 숙희는 다방 레지가 되어 섭이를 까맣게 잊고 여러 사내와 어울려 향락에 빠진다.
시어머니는 마침내 자살하고 숙희는 놀아나던 사내 중의 하나인 천 전무가 환도와 함께 서울에 다방을 내주어서 의젓한 마담이 되어 자기의 미모와 처지에 만족하면서 지낸다. 파티에서 술에 취해 돌아와 거울 앞에 앉으니, 섭이의 친구로부터 섭이가 포로 교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연의 편지가 와 있었다.
숙희는 들여다보던 거울에 크림병을 던졌다. 깨어진 거울조각마다 산산이 찢어져 비친 자기 얼굴 가운데 섭이를 대할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거울에는 갖가지 구슬방울들이 떨어져 아롱져 있었다.
평양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김이석은 지적인 면에서 이상 문학에 비유할 만큼 실험적인 소설을 발표했고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전범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이석은 해방 이후 북한 체제에서 칩거 생활을 하다가 1ㆍ4 후퇴 때 고향이자 주요 활동 무대이던 평양을 버리고 단신으로 월남했다. 김이석은 1954년 「실비명」을 발표하면서 남쪽에서 작가로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발표한 작품들은 매우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들 작품의 배경이나 소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작품의 배경으로 평양이나 해방 이전 이북의 농촌을 다룬 것,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의 비극과 피난민들의 처절한 애환을 다룬 것이다.
김이석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등을 중심으로 한 남한 문단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할 수 있을 만큼 역량 있는 작가였다. 그러나 월남 작가라는 한계로 인해 비평적 조명을 충분히 받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다.
「파경(破鏡)」의 ‘숙희’는 결코 타의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무서운 현실이 그의 운명을 짓밟아 버린 상태로,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자기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체념형의 여인은 아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가려는 사람이었지만, 연약한 여자로서는 너무나도 벅찬 현실이었기 때문에 그 현실에 밀려 그의 운명은 패배하고 만다.
♣
‘숙희'의 앞에 '섭이'라는 청년이 나타났을 때도 '숙희'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자기의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단 그와 동서생활(同棲生活)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들은 얼마나 다정한 부부였던가. 그리고 '섭이'가 군(軍)에 입대한 다음에도 자기의 생활권을 굳게 지키고, 자기 생활의 터전을 닦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굴의 의지도 운명 앞에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이 작품은 보여준다. ‘숙희’는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여러 사내를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대로 생활의 페이스를 구축하여 자기대로의 어떤 안정을 얻었을 때 전사했다던 ‘섭이’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녀가 쌓아온 새로운 생활 질서는 다시 허물어져 버리고 만다. 이 좌절의 반복이 곧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여인들의 비극적인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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