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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허준 단편소설 『잔등(殘燈)』

by 언덕에서 2023. 8. 8.

 

허준 단편소설 『잔등(殘燈)』

 

월북 작가 허준(許俊. 1910∼?)의 단편소설로 1946년 1월 [대조(大潮)]지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허준의 대표작으로, 같은 해 [을유문화사]에서 발간된 작품집의 표제명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보여 주었던 광복의 흥분된 감격과는 대조적으로, 광복과 함께 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함께 실망이 차분하고 담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민족의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암시되어 있다.

  평안북도 용천 출생인 허준은 일본 호세이대학 졸업 후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 <모체>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1936년 2월 [조광]에 <탁류>를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서울시지부 부위원장,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잔등>(대조. 1946.1∼7) <한식일기>(민성. 1946.6) <속 습작실에서>(조선춘추. 1947.12) <평때저울>(개벽.1948.1) <속 습작실에서>(문학. 1948.7) <역사>(문장. 1948.10) 등을 발표하다가 월북하였다. 

 정부 수립 후에 월북한 그는 뚜렷한 작품 실적 없이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재북파 작가로 불리지만 해방 후 남한 정부수립 무렵까지는 서울에 더 오래 머물러 있던 것으로 보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해방 후, 광복의 열기와 착잡함, 그리고 무질서가 뒤얽힌 시대 상황에서 친구인 '방(方)'과 장춘(長春)에서 청진까지 오던 '나'는 열차를 놓친다. '방'과 헤어진 뒤 화물차를 얻어 타고 청진 못 미친 수성까지 오게 된다.

 '나'는 제방을 따라 내려가다가 삼지창을 들고 뱀장어를 잡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이 소년은 뱀장어를 잡아서 일본인에게 파는데, 사실은 숨어 있는 돈 많은 일본인을 알아내어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이 본업(本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인들에 대한 복수에 열성적으로 앞장서고 있는 모습을 '나'는 망연히 바라만 본다.

 '방'을 만나려고 청진역으로 왔을 때, 국밥 장사를 하는 어떤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갓 서른에 남편을 여의었고, 독립운동을 하던 아들마저 일경(日警)에 잃은 사람이다. 그런 불행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난민들에게 너그러울뿐더러, 일본인에게까지 원한과 저주를 넘어 관대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인간 희망의 넓고 아름다운 시야'를 발견한다.

 '나'와 '방'은 다시 군용 열차로 청진을 떠난다. '나'의 머릿속에는 국밥집 할머니의 잔등(殘燈), 뱀장어를 잡던 소년의 잔등(殘燈)이 흐린 불빛으로 새겨진다. '나'는 해방된 조국에서 이국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남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1940년대 만주 장춘

 

 단편소설 「잔등」은 허준이 해방 후 처음으로 쓴 소설로, 화자인 1인칭 화자가 해방이 되어 장춘(長春)에서 친구 방 씨와 서울로 귀국하는 과정을 다룬 내용이다. 이 소설 속의 실제의 거리는 함북 회령에서 청진까지이며, 이 속에 지나 온 장춘까지의 거리와 나아갈 서울까지의 거리가 압축되어 있다.

 이 여로는 ‘장춘서 회령까지 스무 하루를 두고 온 여정이었다’로 시작된다. 무개화차를 수없이 갈아타기도 하고, 시그널도 소용없는 역 구내에서, 혹은 플랫폼에서 언제 기관차가 나타나 움직일까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장춘에서 회령까지 스무 하루가 걸렸다. 그것은 시간 개념이다. 그리고 장춘이란, 8ㆍ15 전까지만 해도 괴뢰정부 만주국의 수도로서 이름이 신경(新京)이었으며, 주인공이 이 여로에서 주로 머문 청진은 일본 군항이었고, 8ㆍ15 직전 소련군과 교전이 있던 요충지대로, 신경 못지않은 공간적 개념이다.

 '나'는 광복을 맞이한 우리 동포들이 패망한 일본을 어떠한 태도를 바라보고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청진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 반응의 실상을 보여 주는 극단적인 예가 된다.

 하나는, 광복 이후의 시대를 걸머지고 나아갈 소년으로, 일본인들의 거동을 샅샅이 위원회에 고발하여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서 벌떡 일어설지도 모른다."며 일본인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청진역 근처에서 국밥을 팔고 있는 노파인데, 이 노파는 일제에 의해 아들을 잃어버렸으나, 아들과 함께 일본 통치의 비리를 폭로하다가 죽은 일본인을 생각하면서, 패망한 일본인들의 거지 행색에 오히려 동정과 연민의 눈물을 흘린다.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나'는 광복의 격앙된 흥분 상태와 균형을 잃어버린 증오심을 확인하기도 하고, 패자에게 보내는 동정과 그 밑바닥의 더 큰 비애를 맛보기도 한다.

 

 

 허준이 즐겨 다룬 지식인의 내면심리 추구는 해방이라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변모하기 시작한다. 단편소설 「잔등」은 그 냉정한 관찰정신과 역사에 대한 중립성, 균형감각이 특히 주목된다. 즉, 광복 전에 발표된 <탁류> <야한기> <습작실에서> 등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의 허무주의적 성격, 냉정한 고백체의 성격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이데올로기적 편견과 맹목성이 없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속 습작실에서>에 이르면 독립투사의 진실한 삶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화자의 중립적 태도가 흔들리지만, 역사현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나타난다.

 허준의 소설은 심리주의 계열로 당대 지식인의 자의식 세계를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자의식의 세계로 칩거하게 된 주된 동기는 일제의 군국주의화 과정에서 파생한 지식인들의 불안의식과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야한기(夜寒記)> <습작실에서>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듯, 현실세계의 압박을 운명의 큰 힘으로 환치시켜 거기에서 오는 허무감을 주인공이 내부세계를 추구하는 이유로 설명하였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나'가 회령에서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청진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청진을 떠나면서 그 할머니의 영상을 황량한 폐허 위에 퍼덕이는 '한 점 먼 불 그늘', 곧 '잔등(殘燈)'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의 불빛이 아니라 지향적인 가치의 불꽃임을 암시한다. '나'는 흥분과 비애를 동시에 바라보는 제삼자의 정신,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일본의 패망 이후를 심정적으로만 인식했던 당시의 흥분과 비애를 객관적으로 응시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이 숨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왜 너의 문학엔  8ㆍ15의 희열이 없느냐?'라고 덤비던 안회남 등의 '문학 동맹' 계열과 대립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