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희 단편소설 『증인(證人)』
박연희(朴淵禧. 1918∼2008)의 단편소설로 1956년 [현대문학] 2월호(통권 14호)에 발표되었다. 이후 1969년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한국단편문학대계> 7권에 수록되었다.
박연희의 작품이 지닌 특징은, 차분하게 묘사하는 수법을 통해 현실 세계의 비인간적인 사회악을 고발하는 데 있다. 이 작품은 자유당 독재 정권의 타락한 부패상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인공의 삶의 파탄을 통해 경직된 현실 제도에 대한 비판과 폭로를 다루고 있다. 권력체제의 무자비한 횡포 아래에서 저항할 길 없이 수난을 당하는 인간상을 여실히 그려놓은 작품이다. 사회악과 정치악에 끊임없이 저항해 온 작가의 문학적 의지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박연희는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던 전후문학의 상황에서 리얼리즘의 전통을 잇는 작가이며 또한 엄혹한 독재정권 시대에서 저항문학의 한 전범을 보여준 작가였다. 특히 단편소설 「증인」은 냉전적 사상 검열, 탄압의 시대에 있어서 함부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민감한 문제를 과감하게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탈냉전적 사상의 소유자인 준과 냉전적 정권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긴장관계를 통해 냉전적 반공주의의 반민주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으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자유당 말기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여 야당에 유리한 기사를 썼던 ‘준’은 신문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다. 근무하던 신문사가 여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신문였기 때문이다.
준은 양심과 언론의 책임을 들어 항변하였지만 비인간적인 권력체제의 무자비한 속성 앞에서 무기력할 뿐인 자신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준은 사직서를 내고 가끔 쓰는 잡문의 수입으로 기원에 가서 바둑이나 두는 생활을 이어간다.
준의 아내는 쪼들리는 살림살이 때문에 현일우라는 학생을 하숙생으로 들인다. 현은 S대 철학과에 다닌다고 말하지만 실은 좌경사상을 지닌 학생이다. 처음 한두 달은 현을 믿던 준의 아내도 차츰 현의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준은 철학과 학생이니까 그런 서적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나친다. 어느 날 갑자기 현은 부산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종적을 감춘다.
준은 뒤이어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체포, 연행되어 간첩과의 접선혐의로 추궁을 당한다. 독방에 갇혀 심문을 받던 준은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 경위까지 밝혀져 더욱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죄 없는 준은 끝까지 자신을 변호한다. 폐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하던 준은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앓아누운 준에게 중학 동창이자 군의관인 ‘강’이 와서 치료를 해준다. 그것도 일종의 감시 역할이라고 생각한 준은 강이 치료를 마치고 돌아간 뒤 눈을 감고 때마침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
이 작품은 한 시대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현장의 주인공은 권력체제의 횡포 아래 박해받는 인간상이다. 「증인」의 주인공 ‘장준’은 자유당 말기의 여당지 기자다. 주변 없고 고지식한 성벽 탓으로 사사오입 개헌파동에 관한 기사를 야당 쪽에 유리하게 써 버렸다.
“신문사 사시(社是)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니야? 그게 기자야? 사표를 내게.”
편집국장의 호령이다. 준은 사실과 양심을 내세워 처절한 항변을 기도했지만, 야만스런 타성과 무비판의 횡포가 태풍처럼 휩쓰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버텨 나간다는 것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준이 실직자가 된 후에 아내가 하숙생 한 명을 들인 것이 좌익의 사상청년(思想靑年)이다. 소설상 이러한 성원(成員)의 개입은 차라리 해방 직후의 분위기에 보다 어울릴 요소이겠으나, 자유당 부패 정권의 말기에도 그러한 사례의 가능성은 있었다.
“역시 서울은 불쌍한 도시군요. 용기가 필요한 도시로 보입니다.”
어느 날 장준을 산책길에 유인한 사상청년 현준이 동산 위에 서서 뇌까리는 말이었다. 그곳에서의 대화엔 로맨티시스트, 미소공동위원회, 세계연합정부로, 물가지수, 공리주의 등 모가 나는 어휘가 마구 등장하면서 현군의 끈적거리는 회의와 불만이 토로된다. 그러나 이 대화를 감당하는 장준의 이성은 충분히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것이(그 관심들이) 진실에서 출발했다면, 인간에 대한 애정 문제가 아니겠소?”
현군의 그 어두운 신랄에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역시 폭풍의 횡포라고 할까. 그 거대한 압력 아래 허약한 생존이 위기에 말려들게 마련인 듯 장준의 집은 밤중에 경찰의 습격을 맞는다. 현군은 부산에 다녀온다고 자취를 감춘 뒤였다. 청년의 방에서는 <마르크스ㆍ엥겔스 전집>이 나오고 준은 간첩과의 접선혐의로 체포된다.
감방 안에서 준은 폐앓이가 악화되어 의식을 잃는다. 병보석으로 집에 옮겨진 준에게 찾아오는 의사는 준의 중학 동창, 그러나 그 의사도 기계적으로 직분에 동원될 뿐인 냉담한 태도다.
“무섭지는 않아, 죽음이…….”
이런 말을 흘리면서 준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를 아까운 듯 오래오래 눈을 감고 듣는다.
♣
이 작품은 진실과 양심을 억압하는 권력의 횡포와, 그런 비인간적인 압력으로 핍박받는 인간상을 통하여 당대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적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삶 자체의 보편적 의미망까지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다.
부언하자면 작가는 사회를 지키는 파수병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깨어 있는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탄광 속의 카나리아’나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역할, 그것이 작가의 시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의 의미는 이러한 측면에서 평가될 수 있다. 6ㆍ25 전쟁이 끝난 뒤에 창작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다른 소설과 같이 이데올로기의 고발 및 인간성을 옹호하려는 휴머니즘을 증대시켰고, 다분히 반공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띠고 있다.
작가 박연희는 이 작품을 직설적 서술이 아닌 구체적 장면의 적절한 묘사에 의해 높은 경지의 작품 세계로 구현하고 있다. 특히 이승만 독재 권력 연장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과 민족 분단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밀도 있게 그려내면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과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의도에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희구와 삶의 회복을 염원하는 주제 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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