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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조명희 단편소설 『낙동강(落東江)』

by 언덕에서 2023. 8. 2.

 

조명희 단편소설 『낙동강(落東江)』

 

소설가·시인·극작가 조명희(趙明熙. 1894∼1942)의 단편소설로 1927년 [조선지광]지 7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으로 발표 후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회주의 계열의 단편소설이다. 조명희는 시에서 소설로 방향을 바꾸면서 이전의 서정적인 시 세계에서 사회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일련의 신경향파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조명희는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궁핍한 현실에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신경향파 소설의 결함을 극복해 나간다.  낙동강에서 농촌의 생생한 세부 묘사와 방언의 도입을 통한 현실감 획득, 주제의 암시적 처리, 인물의 구체적인 형상화와 그들의 이념적 각성과 정의 제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신념 등을 성공적으로 제시하였다.

 이 작품은 일제의 검열에서 너무 많은 삭제로 인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있으나, 김기진, 박영희, 이기영, 최서해 등의 ‘자연발생적인 신경향파 소설’을 한 단계 끌어올려, 보다 구체화된 묘사를 통한 새로운 차원의 소설 기법을 열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가난한 지위로 전락을 거듭하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농촌을 무대로, 조직적인 개혁 운동의 필요성과 단결을 한 인물의 헌신적인 노력과 죽음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을 하던 '박성운'이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그린 이 작품은 '1920년대 우리나라 소설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식민지 시대, 낙동강 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지식인 청년이 어떻게 살아갔으며, 그의 사상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담고 있다. 작품은 낙동강 강물의 잔잔하고 그윽한 흐름처럼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소용돌이치듯 펼쳐지고 있다. 처음 게재될 때 일제의 검열로 상당량이 복자 표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국내에 소개된 <조명희 선집>(1969년 소련에서 발간)에는 원래대로 복원되어 있다.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박성운'의 일생이 중심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박성운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한을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고 성운을 도립간이농업학교에 보낸다. 학교를 졸업한 성운은 군청 농업 조수로 일하게 된다. 그는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직장을 그만두고 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된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집도 없이 누이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다.

 중국 땅 서간도로 간 성운의 가족은 그곳에서도 힘든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 깊이 공감하게 되고, 귀향하여 소작 조합 운동을 전개한다. 농민들의 삶에 뛰어들어 고락을 함께 하며 지주의 횡포에 대항해 소작 쟁의를 일으키는 성운의 활동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점차 운동의 역량을 키워 간다.

 성운이 살던 마을은 낙동강변인데, 그곳에는 주인 없이 방치된 하천 부지가 있어, 동네 사람들의 일터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일제가 들어와 일본인의 손에 불하하는 일이 일어나자, 성운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의 격렬한 항의가 시작된다. 일제는 이 봉기를 힘으로 제압하고, 성운은 주모자로 붙들려 들어가 모진 고문을 받다 병이 생겨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한편, 성운의 농민 운동에 감화된 백정의 딸로서 고등 교육을 받은 로사(박성운의 말-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혁명가 로사 룩셈부르크)는 안락한 삶의 길을 버리고 성운과 의기 투합하여 농민 운동에 뛰어든다. 두 사람은 혁명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같은 길을 걷자고 굳게 다짐한다. 성운은 로사에게, 그녀 자신부터 봉건적 여성관을 떨쳐 버리고 혁명 여성으로서의 길을 갈 것을 고취한다. 성운의 병이 악화되어 끝내 사망하자, 로사는 성운이 말한 대로 '혁명의 폭발탄'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고향 구포역을 떠난다.

 

 조명희의 초기 작품인 <땅속으로>, <R군에게>,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 <농촌 사람들> 등은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소시민적 울분과 보수적인 여성관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혁명 의식, 소위 '사회주의적 전망'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카프(KAPF)가 추구한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식민지 조선 사회의 이중고, 즉 일제 치하의 족쇄(足鎖, 민족 모순)와 자본주의라는 새 생산 양식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새로운 형태의 봉건 잔재(殘在, 계급 모순)의 타파를 주요 과제로 한다. 그리하여, 억눌리며 당하기만 하는 농민․노동자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인간 본연의 자유 의지를 신뢰하며 그들이 주인 되는 사회주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온전히 '사회주의 사상'만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니다. 주인공 '박성운'이 보여 주는 실제 운동은 계급 해방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념보다는 민족주의적 면모를 대단히 강하게 띠고 있다. 즉, 계급 해방이라는 원대한 목표 달성 이전에 일제의 수탈과 잔인성을 폭로하는 데 그는 헌신한다. 따라서, 계급과 계급 간의 대립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이념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인) 사이의 민족적 대립이 더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다음 구절은 이를 잘 입증한다.

 “우리가 우리 계급의 일을 위하여 중국이나 인도에도 갈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일하는 편이 가장 편리하고, 우리는 죽어도 이 땅 사람들과 같이 죽을 책임감과 애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박성운'의 일생을 그리면서,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과 좌절의 과정을 동시에 그려 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명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낙동강」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비극적인 죽음을 그려냄으로써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적인 묘사와는 달리 작품 내용은 뚜렷한 계급 사상을 갖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작품 곳곳에 나타난 서술이나 주인공의 대화 속에는 분명한 역사ㆍ사회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여주인공 로사가 백정의 딸인 것, 그 이름이 독일의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 것도 작가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어떤 틀에 맞춰 그려내지 않았다. 낙동강 가에 전해 오는 민요를 곁들임으로써 문학적인 감동을 살리고 있다. 이 작품이 그 당시에, 또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명희는 일본 유학 시절잠시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라는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부터 하바롭스크 시에서 작가동맹 원동 지부에서 일했으며잡지 [노력자의 조국책임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7년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으며일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1938년 4월 15(혹은 1942년 2월 20)에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 복권되었다.


박성운 (朴聖雲, 1896~1944)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경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에서 이수각·이현설·이종구 등이 주도하는 창수면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박성운은 약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10월 중순부터 1921년 2월 초까지 박성운은 김덕문·이백이·김기학 등과 함께 영덕 등운산에서 은거하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 방안을 구상하였다. 박성운 등은 먼저 울진 출신 전기학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에 가담할 동지를 규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여기에 합류하였다.

 박성운은 1920년 음력 11월 김기학·김덕문·이백이 등과 함께 창수면 인량리 신세희의 자택에 들어가 군자금 4,000원을 요구하였으나, 소지금이 없어 200원만 수령하였다. 이어서 같은 마을 김상락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2월 21일에는 전기학과 함께 영해면 원구리 박세찬을 방문하여 소액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밖에도 영덕·울진 등지에서 수 차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21년 2월 6일 박성운 등은 다시 인량리 신세희와 김상락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성운의 계획을 미리 파악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박성운은 3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