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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남천 장편소설 『대하(大河)』

by 언덕에서 2023. 8. 7.

 

김남천 장편소설 『대하(大河)』

 

 

김남천(金南天. 1911∼1953)이 1939년에 단행본으로 발표한 첫 전작장편이자 가족사 연대기 소설이다. 제1부만이 단행본(人文社. 1939)으로 간행된 채 그 속편이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미완성의 작품이다. 1907∼1910년을 시대 배경으로, 평안도 성천(成川) 두무골에 사는 박성권 가족들의 상호 관계와 그 시대적 변이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삼대>, <태평천하>와 함께 1930년대 가족사 소설을 대표한다. 줄거리의 핵심 사건은 박 참봉(박성권)과 그 아들을 중심축으로 한 가족 간의 애증(愛憎) 관계이다. 쌍네를 가운데 놓고 형준과 형걸이 대결하며, 보부를 사이에 두고 현선과 형걸이 줄다리기를 벌인다. 심지어 기생 부용과 박 참봉 부자(父子)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평안도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초기 상업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 과도기적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본명이 효식(孝植)인 김남천은 평남 성천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을 중퇴한 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동경지부에 가입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 <공장신문> <공우회> 등의 노동소설과 <남매> <소년행> 등을 남겼다. 그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전력 투구한 문인 중 한 사람이었다. 등단 이후 1942년까지 약 10년간 방대한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90여 편의 평론과 2편의 장편을 포함한 40여 편의 소설, 한 편의 희곡은 바로 그의 치열한 문학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8ㆍ15 광복 직후에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 이후 월북하였으나 1953년 남로당계 숙청 당시 함께 숙청당했다.

 

김남천 ( 金南天 .1911- 1953) 가운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박성권은 갑오농민전쟁 당시 군대를 따라다니며 장사하여 돈을 번 후 성천 고을에 정착한 후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불린다. 그에게는 아들 4명과 딸 1명(그중 3남 형걸은 첩의 자식)을 두었는데, 큰아들 형준은 성혼하여 집안일 전체를 관장하는 일을 배우고, 형걸의 동갑내기 형인 제2남 형선이는 '정라수'라는 인물의 딸 정보부와 혼인한다.

 보부를 짝사랑했던 형걸은 심리적으로 방황하다 자기 집 여종(쌍네)과 사랑을 나누는 한편, 동명학교 교사로 부임해 온 문우성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몰입한다. 이후 그는 전도하러 갔다가 기행(부용)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큰아들 형준은 쌍네를 잊지 못하여 찾아갔다가 박대에 분노하여 쌍네와 형걸의 관계를 쌍네의 남편(두칠)에게 고자질하며, 두칠은 박성권 집을 떠난다.

 쌍네는 두칠을 따라 원산으로 갈 것인지, 그로부터 벗어날 것인지 고민하다 형걸이를 만나러 갔다가 형걸이가 그녀를 무관심하게 대하자 그녀는 죽을 결심을 하고 강으로 뛰어간다.

 여러 문제로 답답해하던 형걸이 부용의 집을 지나다가 아버지와 부용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우는 부용을 바라보며 형걸은 새로운 삶을 위해 이 고장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이 작품은 전작 장편이라는 출판 형식에서부터 작가의 만만찮은 패기를 부여주며, 당대로부터 40년 전인 개화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소설이다. 이 작품은 평안도 소도시에 자리 잡은 밀양 박 씨 집안의 역사를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된다. 먼저 밀양 박 씨의 1대인 박성권의 조부는 지방 아전으로서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인물이고, 2대인 박순일은 주색과 아편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박성권의 가계는 조선조 지배 질서의 맨 아래 계층에 속하였던 중인 신분인 셈인데, 작가는 이 계층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 전혀 자각적이지 못하였다. 그 같은 신분적 위상이 격렬한 변동 과정 중에 있던 조선조 말의 사회 동향과 어떻게 관련 맺고 있으며, 또한 규정된 선대(先代)의 역사가 어떻게 후손들에게 접맥 되는가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1대와 2대는 다만 과거의 한 삽화로, 가족상의 첫 부분에 장식적으로 배치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3대인 박성권은 청일전쟁을 틈타 치부한 인물이다. 군대를 상대로 한 장사, 즉 군수품 운반업 등에 종사함으로써 일시에 재산가가 되고, 이를 밑천으로 한 돈놀이로 재산을 크게 늘려 쇠락한 집안을 부흥시켰으며, 돈의 힘으로 참봉의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돈에 대한 강렬한 욕망, 이를 뒷받침하는 넘치는 정력과 악착같은 성격을 지닌 인물을 통해 작가는 봉건 사회의 해체와 돈이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드러내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작품에서 풍부하고도 치밀하게 그려지고 있는 일본 상업 자본의 침투-나카니시 상점과 여기서 취급하는 석유ㆍ양초ㆍ궐련 등의 이 고장에서 보지 못하는 새로운 잡화가 의미하는-양상과 연결되면서 이 작품의 한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이 같은 측면도 작품에서 깊이 있게 묘파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예컨대 상업 자본의 침투에 대한 박성권의 생각과 이에 대응하는 자세가 전혀 분명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박성권 또한 변하는 사회 현실과 관련, 역동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였음을 뜻한다.

 다음 대에 이르면 5명의 자식들이 등장한다. 본처 소생의 3남 1녀와 서자 1명으로 구성된 4대의 인물들이 성장하면서 소설 전개는 본격화되는데, 그 중심은 서자인 형걸이다. 생래적으로 덧씌워진 서자의 굴레, 아버지를 닮아 고집 세고, 왈패스러운 성격, 여기에 기독교와 신식 교육 기관의 근대적 교육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소설 후반부의 중심인물로 솟아오른다. 작가는 이 새롭게 성장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개화기 이후를 그린다. 그러나 작품은 형걸의 가출 결심을 마지막으로 더 이어지지 못한다.

 김남천은 이 작품을 두고 심리의 현대화, 성격 창조의 유약성, 풍속 현상의 공식적 배치 등을 그 결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요컨대, 인물이나 풍속을 동적 현실의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고 그려내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자기 진단을 보여 준다. 그러나 비록 이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더욱이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진정한 역사 소설에의 의욕을 보였다는 점, 일본 상업 자본의 침투 양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는 점,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봉건 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사회의 형성 과정을 비록 일면적이긴 하지만, 예리하게 포착, 묘파 했다는 점에서 소설사상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을 단순히 치정을 둘러싼 연애 소설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가족 이야기를 통해 식민지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 먼저, 박성권을 중심으로 한 밀양 박 씨 일가의 변화는 주로 상승적인 가족사에 해당하는데, 이에 대조되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삽입함으로써 또 다른 변화 양상을 보여 준다. 즉, 같은 밀양 박 씨 문중에서 박이균 형제의 집안이 누대 토호의 영화를 누리다가 결국은 몰락하는 모습과 파평 윤 씨네의 쇠퇴(특히, 윤 초시의 딸 탄실은 빚 때문에 박성권의 첩이 된다)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시대의 변천에 동화하면서 가족의 번영을 꾀하여 물질적인 부를 누리게 되는 박성권 집안의 상승적 가족사와 함께 또 다른 가계의 몰락을 그려 냄으로써 인간사의 융성과 쇠퇴를 함께 다루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당시의 풍속을 충실하게 묘사한 세태 소설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평양에서 원산 가는 길목의 고을에서 박성권이 돈 모으고 여자를 차지하고 격에 맞지 않게 양반 행세를 하고 일본인 상점에는 물건이 잔뜩 쌓이고 신식 학생들이 삭발을 하는 등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지향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박 참봉이 자본주의 시대로의 변화에 맞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거나, 첩의 소생 형걸이 서자 신분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진다거나, 기독교가 근대 사상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어쨌든 '대하(大河)'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우리 근대사의 큰 흐름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접근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심화시켜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