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협 번안소설 『해왕성(海王星)』
언론인·소설가·신소설작가 이상협(李相協, 1893. 고종 30∼1957)이 번안한 소설로 [매일신보]에 1916년 2월 10일부터 1917년 3월 31일까지 269회로 연재하였으며, 그 뒤 1920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원작은 뒤마(Dumas, A.)가 지은 장편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며, 「해왕성」은 일본어역본인 구로이와(黑岩淚香)의 번안작품 <암굴왕(巖窟王)>을 중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개화기에 프랑스의 원작을 번안한 단 하나의 작품이다.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중국으로 바꾸었으나, 인물이나 풍속·가문·수사 등에 있어서 자국의 전통적 유형을 따르고 있다. 주제도 원작과 같이 복수와 행운을 다루고 있으며, 과도적이면서 한국적인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번안 작품이다.
원작의 태생지 프랑스는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의 독자들이 함께한 통쾌한 복수의 대하드라마 <몽테크리스토 백작>(알렉상드르 뒤마). 인간의 시간을 암흑 속으로 밀어 넣는 끔찍한 이프 성의 모험, 그리고 꿈결 같은 낭만과 무한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 준 무인도이자 보물섬 몽테크리스토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의 번안 소설 <암굴왕>은 원작과 두드러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번안소설「해왕성」이라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요컨대 이상협은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 소설을 지렛대 삼아 아예 ‘동아시아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창조해 냈다. 즉 1815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을 배경으로 숨 가쁘게 펼쳐지기 시작하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혹은 <암굴왕>이 아니라, 1894년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발발 전야의 국제 도시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1917년 가을 베이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역정의 세월 속의 「해왕성」이다. 번안소설 <정부원>에 곧이어 선보인 이상협의 후속 연재소설 「해왕성」은 한국의 번안 소설을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질감의 대작이라 할 만하다.
줄거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왕성」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마르세유와 파리에서 ‘청나라 밖의 청나라’ 상하이와 스러져 가는 중화(中華)의 수도 베이징으로 그 무대를 옮아온다. 마땅히 그것은 겉보기만큼 간단한 시기상, 지리상의 변환으로 그치지 않는다. 근대사의 주요한 정치적 고비에 해당하는 연대이자 제국주의 열강의 전방위적인 침탈이 펼쳐진 지역이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역사적인 시간이요 역사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번안 소설「해왕성」은 원작과 견주어 때로는 갈음되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거나 포개지기도 하면서 한결 미묘하고 복잡한 역사음을 울린다.
에드몽 당테스(몽테크리스토 백작)와 똑같은 운명을 타고났으면서도 전혀 다른 신탁을 받은 장준봉(해왕 백작). 그는 세기 전환기의 격동을 온몸으로 견뎌 낼 수밖에 없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개인’이다. 요컨대 평범한 프랑스 인에게 들씌워진 파란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유럽 질서의 동요와 재편은 「해왕성」에서 장준봉이라는 동아시아인이 감당해야만 할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화의 역사로 신중하게 번안되었다. 내용은 악인들의 음모로 죄 없이 갇힌 청년 장준봉은 함께 유폐되어 있었던 성직자 다라법사의 제자가 되는데, 스승이 죽자 감옥을 탈출하여 해왕도에 파묻힌 막대한 보물을 얻고, 해왕백작이라고 자칭하며 악인들에게 복수하고 약혼자 숙정과 재회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상협이 일종의 사명 의식으로까지 삼은 새로운 소설 유형의 개척이란 그런 점에서 한국의 근대 소설이 성취해야만 할 다양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미학적 세련성의 영역이기도 했다. 이상협은 <정부원>과 「해왕성」을 통해 한국의 번안 소설은 남성적인 색채의 규모와 상상력으로 급선회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의 근대 소설이 한층 다변화되는 한편 독자층의 폭과 외연을 과감하게 확대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해왕성」은 번안 소설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할 만큼 값진 창조적 성과다. 일찌감치 소설의 흥미에 역점을 두고 새로운 소설 유형의 실험과 개척에 앞장선 전문 번안 작가 이상협이 공언한바 그대로 가정 소설이라는 오랜 관성과 정면으로 겨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왕성」은 처음으로 ‘장편소설’이라 명명된 연재소설이니 실제로 여느 소설이 섣불리 필적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한다. 한국의 근대소설이 여러 갈래의 가능성과 풍성한 활력을 두루 갖추게 된 계기가 이처럼 대담하고 통 큰 필치로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신문에 연재된 것은 1844년 8월부터 1846년 1월까지였다. 당시 파리의 유력한 정치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ebats)]에 연재되었는데, 막 <삼총사>의 연재를 마친 참이었다.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연재되자마자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흥분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각각 5권과 6권으로 완역된 것도 바로 2002년이었다. 그러니 2002년 이전에 이 두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그저 축약본이나 일본 번역을 다시 옮긴 중역판을 읽은 셈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 가운데 이 두 작품의 완역을 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각 [동서문화사]와 [민음사]에서 간행되었다. <레미제라블>은 좀 어렵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다섯 권이더라도 적어도 이틀 안에 읽게 마련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숨 가쁘게 달려가는 속도감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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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사실은 이상협의 「해왕성」이 절대 번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구로이와 루이코의 <암굴왕>을 거의 글자 그대로 옮기다시피 했는데도 절대 번역이 아니어서 완전히 다른 작품, 새로운 창작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번안 소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고 또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 바로 「해왕성」이다. 프랑스 소설도 아니고 일본 소설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받아쓰기’가 아니라 전면적인 ‘고쳐 쓰기’로 나아간 게 바로 이상협의 「해왕성」이다.
원작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재기를 노리다가 단 백 일 만에 다시 몰락하는 격변기를 배경으로 실마리가 풀린다. 물론 <암굴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협의 「해왕성」은 놀랍게도 1894년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의 암운이 낮게 깔리기 시작하는 시점, 그리고 동아시아의 국제도시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대제국 프랑스의 수도이자 유럽 근대 문명과 문화의 중심지 파리가 아니라 반식민지 중국의 베이징을 무대로 장활한 복수극이 전개된다.
그래서 이 대하드라마 곳곳에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동아시아의 역사가, 동아시아 식민지인들의 상처가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자면 대제국의 수도를 배경으로 제국주의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반식민지를 무대로 반제국주의적 저항까지 슬쩍 드러내고 만 게 바로 이상협의 「해왕성」인 셈이다. 이것은 번안 소설이 노릴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번안 방식이고, 제국의 욕망에 흠집을 내는 가장 세련된 방법이기도 하다.
☞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계보】
▶<몽테크리스토 백작>
대부분의 한국인들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모험과 복수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밀고와 배신, 기나긴 감금과 유폐, 숨겨진 보물섬, 그리고 대복수극.
이 명작의 원작자는 바로 달타냥과 총사대의 활약을 그린 <삼총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다. 빅토르 위고와 한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대문호이지만 같은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고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02년에야 비로소 팡테옹(Pantheon)에 안장된 신문 연재소설 작가, 대중 작가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각각 5권과 6권으로 완역된 것도 바로 2002년이었다. 그러니 2002년 이전에 이 두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그저 축약본이나 일본 번역을 다시 옮긴 중역판을 읽은 셈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 가운데 이 두 작품의 완역을 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각 동서문화사와 민음사에서 간행되었다. <레미제라블>은 좀 어렵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다섯 권일지라도 적어도 이틀 안에 읽게 마련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숨 가쁘게 달려가는 속도감이 살아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신문에 연재된 것은 1844년 8월부터 1846년 1월까지였다. 당시 파리의 유력한 정치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ebats)]에 연재되었는데, 막 <삼총사>의 연재를 마친 참이었다.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연재되자마자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흥분하게 만들었다.
▶<암굴왕(巖窟王)>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동양으로 처음 건너온 것은 물론 일본이다. 세기가 바뀌어 1901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일본의 대중 일간지 [요로즈초호(萬朝報)]에 연재된 것이 바로 <암굴왕>이다. 사실 한국인에게도 이 제목이 훨씬 낯익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아동용 소설이나 논술 대비용 소설은 이 제목으로 번역되곤 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 제목을 쓰는 듯싶다. 얼마 전에는 장편 연속극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요즘 10대가 알고 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대개 원작이 아니라 리메이크된 이 애니메이션이다.
번역자는 1910년대 한국의 번안 소설 거의 대부분의 원작자가 된 구로이와 루이코(黑巖淚香)다. 구로이와 루이코는 메이지 시대 최고의 인기 번안 소설 작가이며, 일본에 프랑스 소설과 추리 소설을 들여온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상협과 민태원 등의 번안 소설은 모두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 소설을 다시 번안한 것이니 그가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구로이와 루이코의 <암굴왕>은 원작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비하자면 분량이 적잖게 줄어들었지만 중심적인 뼈대와 흐름에는 전혀 손대지 않은 번안 소설이다. 다만 등장인물의 이름만 일본식으로 바꾸었을 뿐 그 밖의 고유 명사나 역사적 배경 등도 모두 그대로 두었으니 사실상 번역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일본식 '받아쓰기판'인 셈이다.
<암굴왕>이라는 제목이 아직까지도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원작의 맛을 거의 그대로 살리면서 가장 대중적인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데, 이 작품의 영향력은 식민지 시대는 물론 7,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를테면 프랑스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가 여러 차례 수입되었는데 대개 제목으로 <암굴왕>을 택했다. 예컨대 1932년 춘사 나운규도 연쇄극 <암굴왕>을 제작하고 직접 출연한 바 있다.
▶고쳐 쓰기로서의 <해왕성>
구로이와 루이코의 <암굴왕>이 지닌 매력에 가장 먼저 눈뜬 사람은 하몽 이상협이다. 구로이와 루이코의 <암굴왕>을 다시 번안해서 [매일신보]에 연재한 것은 1916년 2월부터 1917년 3월까지였다. 무려 1년 2개월의 연재. 당시로서는 가장 긴 연재였다. 보통의 신문 연재소설이 3개월에서 길어야 반년 정도였는데 1년 2개월을 끌고 갔다는 건 그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상협의 「해왕성」은 1929년부터 1930년대까지 연재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나올 때까지 가장 긴 연재소설이었고, 심지어 <임꺽정>을 광고할 때 <암굴왕>이나 「해왕성」에 견주어 그 스케일을 자랑하기도 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장편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전범을 제시한 것이고 실제로도 한국 소설사에서 처음 장편소설이라는 말을 쓴 것이 바로 「해왕성」부터였다.
이상협의 「해왕성」 은 일단 제목부터 눈여겨볼 만한 소설이다. 원작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구세주의 산'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인간의 시간을 마비시키는 이프 성을 14년 만에 탈출한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가 파리야 신부가 일러준 대로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겨진 바위섬을 자신의 영지로 삼고 스스로를 우러러 이런 배짱 두둑한 세례명과 백작의 작위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자면 일본식 제목 <암굴왕>은 훨씬 음산하고 우울한 빛깔을 머금었다.
그런데 이상협은 이걸 왜 다시 「해왕성」으로 고쳤을까?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 이름이기도 한 해왕성! 그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니던가? 유피테르(Jupiter)의 형제 넵투누스(Neptunus), 그러니까 제우스(Zeus)의 형제 포세이돈(Poseidon)을 일컫는 신화적인 이름이자 제목이다. 1910년대 한국인들에게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그렇게 장엄하고 상서로운 이름으로 처음 다가왔다.
☞ 이상협 번안소설 『정부원(貞婦怨)』 :
영국 인기 작가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의 <Diavola; or, The Woman’s Battle>의 원작을 구로이와 루이코가 일어로 번역한 작품이 <버려진 쪽배(捨小舟)>이다. 일본어판을 이상협이 국어로 번안한 소설이다.
유럽을 무대로 한 서양 소설이라는 감각을 처음으로 제시한 『정부원(貞婦怨: ‘정렬한 부인의 비탄’)』은 가정 소설의 의장(擬裝)을 차리고 있으면서도 추리 소설에 가까운 편이다. 개성적인 등장인물과 조밀하게 엮은 플롯, 추리 소설의 기교와 수법까지 성공리에 완역하고 직역함으로써 획기적인 가능성을 보여 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부원』은 [매일신보]에 연재(1914. 10. 29~1915. 5. 19)되었다. 연재 당시, 매일신문은 일본인 서양화가 야나기타 겐키테가 매회 그린 삽화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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