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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사랑'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6. 7.

 

'사랑'의 어원

 

 

 이 세상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자라서 분규가 일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박애정신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사랑이라면 모르겠는데, 남녀의 사랑에 이르면 그것이 숭고하기에 그렇다는 것인가, 시끄러운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왕관을 버린 일이 있었는가 하면,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는 논리도 있고, 사랑했기 때문에 죽었더라는 논리도 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한분은, 사랑이 어떻더냐고 자문해 놓고 나서, 길더냐 짧더냐, 모나더냐, 둥글더냐고 회의해 보다가,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모르겠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본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하는 말이 있고, 장희빈에 양귀비가 들먹여지는 것을 생각할 때, 인류의 역사는 사랑 그것의 지엽적인 분파작용에서 움직여져 왔던 듯싶기도 화다.

 보통 서양의 동적인 것에 대하여 동양의 정적인 것이 내세워지는 것이 사상사의 흐름인데, ‘사랑’에서도 그러한 냄새가 안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 자체에서부터 그 연유를 느끼게 해 주기도 했다.

 우리의 중세어(中世語)에서의 ‘사랑’은 ‘愛’라는 뜻으로 쓰임과 함께 ‘思’라는 뜻으로도 아울러 쓰이고 있었다. ‘사랑하다’라는 말에는 달리 또 ‘닷다’라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사랑은 생각하는 데 그 뜻이 있어서 부모가 그 자식을 생각함이 곧 사랑이요, 춘향이가 이도령을 생각함이 또한 사랑이었다고 할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또 ‘사랑’을 살펴본다면, ‘살다’에서 그 뜻이 갈려 나왔던 것이나 아닌가 생각하게 해 주기도 하는데, ‘살다’의 어간(語幹)인 ‘살’에 ‘앙’이라는 가지(접미어)가 붙은 형태가 아니겠나 해서의 말이다. 살아 나간다는 것은 곧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고, 살아나간다는 것은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여 나가는 것이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생각하는 사랑’도, 이제는 차츰 동적인 것으로 변색되어 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 생각하는 사랑이 그 심오한 인간의 정의(情誼)에서 출발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즈음의 그것은 얄팍한 정감에 보다 더한 중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해서의 말이다.

 ‘봄 미나리 살찐 맛을 임에게 보이과저’하는 애틋하고도 윤습한 사랑의 시대는 벌써 물러갔다는 말인가. 거리를 걸으면서 껴안고 가는 피앙세에, 다방에라도 들를 양이면, 손과 손을 부여잡고 있는 풍경도 목도할 수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웨딩마치를 울린 지 한 달 만에 아기를 낳은 신혼부부도 있게 되었으니, ‘사랑’이라는 출발의 ‘사랑’을 생각할 때, 이제 ‘사랑’의 뜻을 나타내는 말은 달리 또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마음도 든다. 어쩌면 사랑은 육감적인 것보다는 다스움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값지고 보배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할 때, 우리말 ‘사랑’이 참으로 그립게 느껴지기조차 하는구나.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일본말의 ‘사바’(散飯ㆍ生飯)다. 이 일본말 ‘사바’는 밥 먹기 전에 아귀(餓鬼)에게 한 숟갈 걷어주는 밥을 이르는 말이니, ‘사바사바’의 생리가 뒤탈이 없기를 바라면서 부정한 물품 공세를 가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 ‘시바’에서 온 것이라는 해석도 그럴듯해진다. 그리고 이 말 쪽의 어원론이 상당히 유력하게 통하고 있다.

 어디서 온 말이었든, ‘사바사바’ 그것이 통하지 않게 되는 사회가 명랑사회의 첫 발 디딤이 될 것이리라.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을유문화사. 1985) -

 

 


 

 

'사랑'의 어원

 

 

 사람(人)이란 명사가 살다(生)라는 동사에서 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문제점이 있다. 사람이 먼저 있고 ‘살다’라는 동사가 생겼다고 봐야 개연성이 있다고 하겠다. ‘사람’이 없는 어떻게 ‘살다’라고 하는 동사가 생길 수 있겠는가? ‘살다’라고 하는 동사의 어간 ‘살’은 본디는 인(人)을 뜻하는 명사라 하겠고, 명사가 동사로 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어의 사람(人), 사랑(愛)이지만, 어근은 ‘살’이고 ‘암’이나 ‘앙’은 모두 접미사가 된다. 사랑은 무당이 ‘묻'에 ’앙‘ 접미사가 붙은 것과 같은 조어법이다. 인(人)과 애(愛)를 뜻하는 어근 '살'은 ‘삳’으로 재구(再構)한다.

 몽고어에서 saton은 애인, 사랑스럽다, 친척의 뜻을 지니고, 만주어에서 satun은 친가의 뜻을 지니며, 국어에서는 saton이 인척의 뜻을 지닌다. saton의 어근은 sat이고, on은 접미사가 된다. sat은 명사로서 ‘인(人)’ 또는 ‘애(愛)’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겠고, 국어의 ‘살’의 조어 ‘삳’과 일치하고 있다.

 몽고어에서 sanal, sanagal은 애(愛), 사상의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의 어근은 san인데, sat의 말음(末音) t가 n으로 변한 말이다. 말음 ㄷ이 ㄴ으로 변하는 것은 국어에서도 볼 수 있는데, 몽고어 nidu(眼)가 '눈‘이고, 경상도 방언에서 '못(몯)하다'가 '몬하다', '몯들어간다'가 '몬들어간다'로 ㄷ이 ㄴ으로 바뀌었다.

 사랑ㆍ사상의 뜻을 지니는 san도 sat에서 비롯한 말인 것이다. 15세기 국어에서 ‘사랑’이 ‘애(愛)’ㆍ사(思)’의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쓰였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보겠다. 본디는 sat이 인(人)의 뜻을 지니다가 인지(人智)가 발달함에 따라 애(愛)의 뜻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결국 사랑이란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잉태된다는 이야기가 되겠으며, 사랑은 사람의 속성임을 보여준다.

 만주어에서 salgan은 ‘처(妻)’의 뜻을 지니는데, 어근 sal이 국어의 ‘살’과 일치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 있다.

 

                                               - 서정범(徐廷範) : <어원별곡(語源別曲)>(범조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