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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안국선 신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by 언덕에서 2023. 7. 17.

 

안국선 신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신소설작가 안국선(安國善, 1878∼1926)이 지은 신소설로 1908년 [황성서적업조합(皇城書籍業組合)]에서 출간하였다. 1909년 언론출판규제법에 의하여 금서 조치가 내려진 작품 중 하나로, 동물들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한 우화소설이다. 서언(序言)에서 화자가 금수의 세상만도 못한 인간세상을 한탄한 뒤, 꿈속에 금수 회의소에 들어가 그들의 회의를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각종 동물들을 등장시켜 ‘인간 사회와 인간’에 대한 논제를 통해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현실을 비판, 풍자하는 우화소설이다.

 이 소설이 다른 신소설과 다른 점은 ‘나’라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 인간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관찰자인 ‘나’가 꿈속에서 인간의 비리와 간사한 현실 사회를 성토하는 동물들의 회의장에 들어가 동물들의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액자소설의 형태를 보여 주며, 고대소설의 몽유록계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꿈속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꿈을 깨는 서사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신소설들이 지니는 소재, 주제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점도 그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즉, 권선징악적 주제나 이야기 서술에 치우친 형식을 벗어나 현실 비판의 주제 의식과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점에서 다른 신소설 작품과는 다르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사회와 국민들에 대한 강렬한 풍자와 비판 정신이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이제까지 제기된 문제를 기독교에 의존해 해결하려는 안이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결말은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을 침탈하고 내정의 부패가 극심하던 시기에 전혀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역사발전에 대한 이해와 현실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직시하지 못했던 안국선은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공진회'를 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금수회의소’라는 모임 장소에 8종류의 동물들이 회의를 통해 인간의 온갖 악을 성토한다. '회장인 듯한 한 물건'이 금색 찬란한 큰 관을 쓰고 영롱한 의복을 입은 이상한 태도로 회장석에 올라가 개회 취지를 밝힌다. 이 회의의 안건은 첫째, 사람 된 자의 책임을 의논하여 분명히 할 일, 둘째, 사람의 행위를 들어서 옳고 그름을 의논할 일, 셋째, 지금 세상 사람 중에서 인류로서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조사할 일 등이다. 이러한 안건을 가지고 토의를 시작한다.

 이때 제1석에 앉은 까마귀가 물을 조금 마시고 연설을 시작한다. ‘반포지효(反哺之孝)’의 예를 들면서 인간을 비난한다. 그리고 제2석의 여우가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들면서 기생이 시조를 부르려고 목을 가다듬는 간사한 목소리로 인간의 간사함을 성토한다. 제3석의 개구리는 ‘정와어해(井蛙語海)’의 예를 들어 분수를 지킬 줄 모르고 잘난 척하는 인간을 비난하고, 제4석의 벌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예를 들어 인간의 이중성을 비난하고, 제5석의 게는 ‘무장공자(無腸公子)’의 예로써 외세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비난한다. 그리고 제6석에 앉아 있던 파리는 ‘영영지극(營營之極)’을 들어 인간의 욕심 많은 마음을, 제7석의 호랑이는 ‘가정이맹어호(苛政而猛於虎)’를 들어 인간의 험악하고 흉포한 점을 성토한다. 제8석에서는 원앙이 ‘쌍거쌍래(雙去雙來)’를 예로 들며 인간의 더럽고 괴악한 심성을 폭로한다.

 끝으로, 회장이 폐회의 말에서, “여러분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다 옳으신 말씀이오. 대저 사람이라 하는 동물은 세상에 제일 귀하다, 신령하다 하지마는 나는 말하자면 제일 어리석고, 제일 더럽고, 제일 괴악하다 생각하오. 그 행위를 들어 말하자면 한정이 없고, 또 시간이 진(盡)하였으니 고만 폐회하오.”라며 폐회를 선언한다. 이때 그 회의 장소에 모였던 짐승들은 일시에 나는 자는 날고, 기는 자는 기고, 뛰는 자는 뛰고, 우는 자도 있고, 짖는 자도 있고, 춤추는 자도 있으며, 인간의 온갖 악정을 성토하며 돌아간다.

 이러한 동물들의 인간 세태를 성토하는 광경을 보고 들은 ‘나’는, “내가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 욕을 보는고!”하면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기독교적 설교 형식을 빌어 인간 구원의 길을 역설한다. 그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예수씨의 말씀을 들으니, 하나님이 아직도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니, 사람들이 악한 일을 많이 하였을지라도 회개하면 구원 얻는 길이 있다 하였으니, 이 세상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는 깊이깊이 생각하시오.”

 

신소설작가 안국선 ( 安國善, 1878-1926 ) : 사진 출처[안성신문]

 

 이 소설은 일정한 줄거리가 없으며 이렇다 할 사건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소설로서는 큰 파격이다. 의논할 안건으로 제일, 사람 된 자의 책임을 의논하여 분명히 할 일(자기의 책임을 다할 줄 아는 인간). 제이, 사람의 행위를 들어서 옳고 그름을 의논할 일(올바르게 행동하는 인간). 제삼, 지금 세상사람 중에 인류의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조사할 일(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인간)을 들었다. 동물들의 연설은 각각의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고사성어 및 전래적인 속담 등 관용어에서 차용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등장시켜 지극히 막연하고 모호한 종교적 설교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작품은 8가지 동물이 인간의 제반 악정을 성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인간 사회의 정치 비리를 풍자하고 있으며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인간을 논박한다. 참여 문학적인 성격이 강하며 '나'라는 1인칭 관찰자가 꿈속에서 인간의 비리를 성토하는 회의장에 들어가 동물들의 연설을 기록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의 구성을 이루는 회의 형식은, 비록 대화식의 토론 진행은 아닐지라도 단상에 나와 발언할 때에는 반드시 회장으로부터의 발언권을 얻고 나오는 것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비판이 절정에 이르는 발언에 이르러서는 '손뼉 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공명을 얻는 광경 등 일련의 회의 진행이 현대의 정견 발표회를 방불하게 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판매 금치 처분을 받은 이 소설은 동물들의 연설을 통하여 개화기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정치적 자립, 민권 사상 및 도덕의 정화와 정치적 개조를 주장하고 있다. 즉 우화소설이며 또한 정치소설로서 계몽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소설은 각종 짐승들을 인격화시켜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부패상을 비판, 풍자한 우화소설이다. 또, 일반적으로 신소설들에서 볼 수 있는 권선징악적 소재나 주제를 지양하고 있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그리고 ‘나’라는 1인칭 관찰자를 서술자로 한 나머지 아홉 개의 이야기는 또 다른 액자로 중첩된 액자소설 형태이다. 이 아홉 개의 이야기는 서사문학으로서의 사건의 서술이 아닌, 연설이나 토론 형식이어서 예술성은 다소 결여된 듯 보인다. 그러나 의식의 계도라는 안국선의 사회관과 인간관이 표출된 정치소설로서의 가치 평가는 매우 고무적이다. 특히 정치학 전공인 안국선이 짐승 입을 빌려 인간을 비판한 놀라운 풍자 정신은 개구리와 호랑이의 정치적 발언에서 더욱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