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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태준 단편소설 『복덕방(福德房)』

by 언덕에서 2023. 4. 24.

 

이태준 단편소설 『복덕방(福德房)』

 

 

 

월북작가 이태준(李泰俊. 1904∼?)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1937년 3월 [조광] 지에 발표되었다. 이후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소설집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단편소설 『복덕방』에는 생활의 기반을 상실한 세 노인이 복덕방에서 소일한다. 뚜렷한 미래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이들의 꿈과 좌절을 작가는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1930년대에 이미 부동산 투기의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광복 이전 이태준의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농후하게 나타낸다. 인간 세정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광복 이후에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 전투>(1949) 등은 생생한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일제하의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된 것이라는 후문을 남기고 있고, 결국 한국전쟁 이후 숙청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으며 그의 열정은 오히려 순수성으로 해서 오해를 받는 인간적 서정성에 기초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상허 이태준(李泰俊. 190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은 얼굴색이 붉고 눈망울이 큰 서 참의이다. 그는 훈련원 참의를 지냈는데, 합방 후 별수가 없을 것 같아서 가옥 중개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이 잘되기는 하지만, 가끔은 훈련원 참의에서 한낱 복덕방 영감이 되어버린 데에 대한 회한이 일기도 했다. 세심한 안 초시와는 성미가 맞지 않아 다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안 초시는 한동안, 이 복덕방에 얼씬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안 초시를 데리고 오는 사람은 박희완 영감이었다. 그는 안 초시처럼 복덕방에서 기거하지는 않는다. 안 초시는 복덕방에서 화투패를 보며, 사업에 대한 야심이 커서 언제든 한 번쯤은 무슨 수가 생겨 다시 한번 일어서리라 생각한다. 안 초시에게는 경화라는 딸이 있다. 그녀는 일본에서 무용을 배워 온 무용가이지만, 아버지인 안 초시에게는 야박했다. 안경다리를 고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50전을 주기에 안 초시는 몇 번을 담뱃값으로 써 버렸다. 그래서 안 초시의 안경 한쪽 다리는 종이 끈으로 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박희완 영감은 모 유력자를 통해 나온 말이라면서 황해 연안에 제2의 나진이 생긴다고 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큰 항구가 꼭 필요한 것은 상식으로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이 되려는지 여간해서 잘 떨어지지 않던 거북패가 단번에 뚝 떨어졌다. 안 초시는 이날 저녁에 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딸은 귀가 솔깃하여 사흘 안으로 삼천 원을 융통하기로 했다. 안 초시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돈이 되는 날, 웬 청년이 나타났다. 사위 격인 그 청년이 돈을 쓰며 그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순이익금 오륙만 원 중에서 만 원쯤이야 어디 가랴 싶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모든 게 꿈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력자라던 관변의 아무개 씨에게 박희완 영감이 속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 벼락이 안 초시에게 떨어진 것이다. 작년보다 더 비참한 추석이었다. 여름이 극성스럽게 지나더니 무서리가 일찍 내렸다. 참의는 안 초시를 위로해 주려고 복덕방의 미닫이를 열었다. 누워있는 안 초시의 얼굴이 잿빛이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무슨 약병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안 초시의 영결식이 그의 딸의 연구소 마당에서 열렸다. 제법 반반한 조객들이 모였다. 모두 고인과 아는 사이가 아니라, 무용가인 안경화를 보아서 온 사람들이었다.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은 가슴이 답답했다. 분향하고 무슨 말인가 한마디 했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으나, 울음이 먼저 터져 나오고 말았다. 묘지까지 따라갈 작정이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도로 술집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훈련원의 참의로 있었던 '서 참의'는 군대가 해산되고 할 일이 없게 되자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작한 복덕방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닦는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세상은 먹구 살게 마련야.' 하는 긍정적이자 낙천적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 물론 '기생, 갈보 따위가 사글셋방 한 칸을 얻어 달래도 예~예 하고 따라나서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서글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훈련원 시절의 기개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서 참의와 대조적인 인물이 '안 초시'다. 그는 현실이 불만족스럽다. 말끝마다 '젠장' 소리를 한다. 그는 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를 보고 생활의 낙오자가 되어 서 참의의 복덕방에서 소일하는 노인이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라고 고백하는 그는 현실 속에서 남들처럼 호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몽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일확천금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박희완' 영감이 일러준 소문을 믿고 딸을 부추겨 부동산에 투자한다. 이른바 신항구 건설 계획을 관청에서 빼내어 그곳의 부동산을 미리 사 두면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말은 실패로 끝이 난다. 그는 50전이 없어서 안경다리를 고치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딸의 돈 삼천 원을 잃고 취할 행동은 자살밖에 없을 것이다. 안 초시의 자살은 허황한 꿈을 가진 인물의 서글픈 귀결이다.

 반면에, 물질주의와 자신의 출세에 사로잡혀 있는 딸(일설에 의하면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했다고도 한다)은 아버지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한다. 그래서 호사스러운 장례식을 치른다. 안 초시의 죽음을 슬퍼하는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은 묘지에 따라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 초시의 딸 경화와 조문객들이 내보이는 인간적 허세가 역겨웠기 때문이다. 친구의 죽음과 인간미 상실의 체험. 그들은 가슴이 답답하다.

 

 

 상실의 일본 강점기에 생활의 기반을 잃어버린 세 노인(안 초시, 서 참의, 박희완)이 복덕방에 모여 날을 보내고 있다. 이 세 노인을 통해 작가는 1930년대 뚜렷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궁핍한 사회상 속에서 가져보는 꿈과 그 좌절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안경화'라는 허세와 이기주의로 가득한 딸과 부동산 투기의 실패로 자살을 하는 '안초시'의 모습을 통해 무너져 가는 가족 공동체의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몰락하여가는 ‘안 초시’를 중심으로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이 모여 있는 무대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하여 정면 대결을 피한 대신 그것을 제재로 서민 생활의 한 단면을 부각한 것이다. 즉, 봉건적 풍속 속에서 급격히 식민지 자본주의적 풍토로 변모해 가는 사회 변화 추세 속에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는 수동적 인물을 그렸다는 평이다.

 따라서 작가 이태준을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의 작가라고도 하는데 그의 대표작으로 평판되는 「복덕방」을 비롯, <가마귀>, <불우(不遇) 선생> 등은 거의 전부 일상적인 사소한 것들에게 복수를 당하는 패배적 인간들이 그려지고 있다. 결국, 사회에 대해서는 냉소로,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는 아이러니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페이소스로 응답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