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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태준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

by 언덕에서 2023. 3. 21.

 

이태준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

 

 

월북작가 이태준(李泰俊, 1904~)의 처녀작 단편소설로 1925년 7월 [시대일보]에 게재되었다. 1939년 <이태준 단편선>에 수록할 당시는 개작하여 원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새로운 작품으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체험적 요소가 짙은 작품을 주로 발표한 이태준은 1930년대 후반 정지용과 함께 [문장] 지를 주재하면서, 특유의 섬세하고 정확한 문체를 통해 전통 지향적인 소재와 지식인의 고뇌 문제를 다뤘다. 해방 이후 월북하여 [조소문화연맹(朝蘇文化聯盟)] 위원장을 역임하다가 1950년대 후반 북한 노동당의 남로당 출신 인사들에 대한 제거 공작 때 숙청되었다. 모델소설이 아니라는 작가의 부기(附記)가 있는 이 작품은 1920년대 사회의 궁핍상과 그로 인한 왜곡된 애정 행각을 보여주고 있다. 변방 지방을 배경으로 한 애정 행각에 관한 내용과 사건이 주된 제재가 되는 이 작품은 유려한 필치가 돋보인다.

 두만강변에 있는 궁핍한 마을에서 늙고 가난한 소경 지참봉(池參奉)과 함께 살아가는 젊은 여인 오몽녀가, 총각 어부 금돌(金乭)과 주재소 남순사(南巡査) 사이에서 자유분방한 애정 행각을 벌인다. 이후 지참봉이 남 순사에게 독살당한 뒤 금돌을 선택하여 새 삶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주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윤락된 탕녀가 아닌, 밝은 삶을 지향하려는 각성한 한 여인의 ‘사랑의 탈주’를 그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운규 영화 [오몽녀] 광고, 1937년 경성촬영소 제작,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함경북도 북단의 마지막 항구인 서수라를 배경으로 한, 두만강과 동해변에 눈먼 점쟁이 지참봉은 총각 시절에 아홉 살 된 오몽녀를 사다가 키운 후 부부생활을 해 오고 있다. 그런대로 복스럽게 생긴 오몽녀는 자신이 장님 점쟁이의 아내로 족할 여자가 아니었다. 지참봉은 오몽녀를 끔찍하게 아끼지만, 그녀는 좋은 반찬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남편을 먹이는 법이 없다. 남편은 못 먹이더라도 저만 배부르면 그만인 여자다.

 팔월 중순, 오몽녀는 자신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입쌀을 장만하고 미역오리를 뜯어놓고, 생선을 장만하고자 바닷가로 나가 고기잡이배에 올라갔다. 생선이나 백합이 먹고 싶으면 늘 이 배에 나가 주인이 없는 사이에 고기를 훔치곤 했다. 이 배 주인은 이태 전에 웅기에서 온 금돌이란 청년으로, 그가 고기를 팔러 간 시각을 틈타 오몽녀는 고기를 훔쳐 가곤 했다.

이날도 오몽녀는 고기를 훔치러 배에 들었으나, 갑자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닷가로 나온 배에는 금돌이가 매번 잃어버리는 고기를 누가 훔치는지 지켜볼 겸, 그 안에 머물고 있었다. 이 일을 기화로 금돌이와 가까워진 오몽녀는 지참봉과 비교해 보고는 자신의 생활에 불만을 품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정이 깊어진 금돌이와 자주 배 안에서 만나곤 했다.

 서수라는 국경 지방이라 무당단과 아편, 호주(胡酒), 담배 등을 밀수하는 업자들의 내왕이 잦은 곳이어서 경관들의 단속이 심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객이 묵어가는 말이 되면 객보책에다 객보(客報)를 써서 주재소에 보고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평소 오몽녀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남 순사는 구월 어느 날, 객 하나가 지참봉의 집에 들러 저녁을 시켜 먹고 누웠다가 서수라로 드는 뱃고동 소리를 듣고 그날 밤에 떠나 버린 사건이 있었다. 객보를 할 사이가 없었다.

 때마침 주재소에는 소장이 사냥하러 가고 남 순사가 숙직하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오몽녀를 객보 안 한 죄로 유치장에 가둬 놓고는 지참봉을 얼렀다. 영문을 모르는 지참봉은 갇힌 오몽녀를 속히 나오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밤이 이슥해서 남 순사는 유치장에 가둔 오몽녀를 따스한 숙직실로 옮겨 놓고 안심하게 한 다음 정을 통했다.

 그 후 남 순사는 오몽녀를 으레 만나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고는 술을 거나하게 먹고는 지참봉의 집으로 몰래 들어가 오몽녀와 정을 통하다가 지참봉에게 구두가 발견되면서 돈으로 입막음을 하였다. 그 뒤로는 오몽녀가 집에 없으면 지참봉은 으레 남 순사에게 간 것으로 알게 되었다.

 한편, 금돌이는 뜸해지는 오몽녀의 발길에 마음이 달아 있다가 생선을 팔러 주재소 소장네 집에 가는 길에 그녀가 주재소 숙직실에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길로 금돌이는 먹을 것을 장만하여 오몽녀를 데리고 밤을 틈타 근처에 있는 무인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지참봉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남 순사 탓으로 돌렸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오몽녀 때문에 화가 치민 지참봉은 그녀가 나간 지 사흘 후 남 순사를 오게 해서 그에게 매달려 여자를 내놓으라고 악을 썼다.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남 순사는 뒤탈을 염려해서 우선 자신의 소행이라고 지참봉을 안심시켜 놓은 다음, 오몽녀를 찾아 소수라, 옹기 등지로 그녀를 찾으러 다녔으나 허탕이었다.

 ‘지참봉만 없으면 오몽녀는 내 것’이라 여긴 남 순사는 독한 호주(胡酒) 한 병과 압수해 놓은 아편을 얼마 떼어 지참봉을 살해한 다음 자살한 것으로 위장시켜 놓았다.

 남 순사는 오몽녀를 찾아 다시 웅기로, 서수라로 다녔으나, 허탕을 치고 오륙일 만에 돌아왔으나 오몽녀는 이미 그 전에 돌아와 있었다. 이전의 범죄보다도 탐심에 빠진 남 순사는 오몽녀에게 남편의 죽음을 오몽녀 탓이라고 위협한 다음 첩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오몽녀는 우선 금돌이에게 정이 들어, 남 순사가 가져다주는 쌀이나 이부자리, 놋숟갈 한 가락까지 모조리 빼내어 금돌과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서수라(西水羅)라 하면 저 함경북도에도 아주 북단 원산, 성진, 청진 웅기를 다 지나 마지막으로 붙어 있는 항구다.

 이 서수라에서 십 리쯤 북으로 들어가면 바로 두만강이요, 동해변인 곳에 삼거리(三街里)라는 작은 거리가 놓였다. 호수는 사십 여에 불과하나 주재소가 있고 객주집이 사오 처나 있고 이발소 하나 있고 권련, 술, 과자, 우편절수 등을 파는 잡화점이 하나 있고, 그리고는 색주가 비슷한 영업을 하는 집 외에는 모두 농가들이다. 그런데 이 사오 처 되는 객주집의 하나인 제일 웃머리에 지참봉네라고 한다. -본문에서

 이처럼 간결ㆍ명료한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이태준은 이광수의 뒤를 이어 소설의 미적 가치와 문체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이 작품에는 비록 처녀작이지만, 이 같은 문체의 미덕들이 다분히 담겨 있다. 이를테면, 불륜과 범죄와 같은 사회적 암울함에 대한 분석과 묘사가 객관적이면서도 명징한 문체에 힘입어 보다 명확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단편소설의 명장으로 러시아에 체호프, 프랑스에 모파상, 미국에 오 헨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이태준이 있다. 이태준이야말로 우리나라 단편 문학의 완성자라 이를만하다. 이태준이 이룩한 예술적 성취는 단지 수려한 문장이 보여주는 기교나 서정적인 분위기라기보다는 그가 그려내는 선명한 인물상에서 비롯된다. 그는 시대와 환경의 그늘 속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존재들을 선명한 인간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다. 이태준이 창조해낸 인물들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는 시대 속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존재이지만 자기 색깔이 있는 분명한 존재로서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이다.

 장님 지참봉을 제외하면, 오몽녀, 금돌, 남 순사 등은 모두가 인간의 본능과 욕망 사이에서 각축하는 타락한 인간 군상이다. 이 작품은 결국 궁핍한 사회 상황 속에서 순박함이 각박한 세속적 삶에 희생되는 부정적 면모를 드러내 보인다. 지위와 권력에 의존해서 살인과 축첩을 일삼는 남 순사, 훔쳐 가는 고기를 미끼로 정을 통하는 금돌, 이 사이를 오가며 질긴 생명력을 지니면서도 계산과 애정에 몸을 던지는 오몽녀 등은 말하자면, 사회 내의 금기와 제도적 힘을 상실한 한 변방에서 일어난 인간들을 회화화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