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浿江冷)』
월북작가 이태준(李泰俊. 1904∼?)의 단편소설로 [삼천리문학]에 1938년 1월 발표되었다. 패강(浿江)은 대동강을 의미하며 따라서 「패강랭(冷)」은 '대동강이 얼었다'는 뜻이다.
이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서는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비애의 감정과 그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현실 순응주의자(일제에 영합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이 이태준 문학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지사(志士)적인 마음가짐을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 준다. 이 작품은 대동강변과 평양 시내에 대한 짤막한 묘사 뒤에 세 친구의 술자리 장면을 전편에 할애해서, '현'과 '김'의 대화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소설에서 '현'과 '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는 것은 예술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김은 현에게 이제 '방향 전환'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 방향 전환이란 일본어로 소설을 쓰거나, 조선어로 쓰더라도 팔릴 만한 글을 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말을 듣자 현의 감정은 마침내 폭발해 버린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린 이래뵈두 예술가다! 예술가 이상이다!"라는 말이다. 현이 김에게 '우리는 예술가다'라고 외치는 말 것은 말 그대로 속물들의 세계에 맞서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술가 이상이다'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자족적인 것으로서의 순수한 예술 행위가 그 바깥 세계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벽루 다락은 고요하기만 하고, 대동강 물은 차갑기만 하다. 현(玄)은 조선 자연은 왜 이다지 슬퍼 보일까 하고 생각한다. 현은 평양이 십여 년만이다. 새로 쓸 소설의 스케치를 위해 오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벼르기만 했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었건만 선뜻 마음이 나지 않았던 차에, 이번엔 박(朴)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박은 편지에서 강사 자리도 얼마 안 가서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 현은 자기가 가서 위로해 주어야만 할 것 같아 이렇게 평양으로 내려왔다.
정거장에 나온 박은 수염도 깎지 않았고, 찌싯찌싯 비웃는 웃음을 보인다. 현은 박에게서 선뜻 자기를 느끼고 괴로워진다. 나중에 대동강 가의 동일관이란 요정에서 만나기로 하고, 현은 혼자 모란봉으로 와 걷는 것이다. 오는 길에 자동차에서 본 평양 거리는 달라진 것이 많았다. 빌딩도 늘었고, 무엇보다도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평양 여인들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제 고장에 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평양은 또 한 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곳이었다.
동일관까지 배를 타고 흘러 내려간다. 강물에 내민 바위 위에 지은 집이다. 거기에 박과 부회 위원인 김이 와 있다. 반가운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는 중 기생들과 말참견을 한다. 12년 전 유명한 기생이었던 영월이를 화재에 올린다. 문학청년이던 현을 사모하던 영월이었다. 박은 보이더러 영월이를 불러 달라고 한다. 김이 현더러 이제 방향 전환을 하라고 타이르는 중에 영월이 들어온다. 영월의 얼굴에 세월의 자국이 묻어 있었다. 현은 세상살이의 고단함에 대해 말한다. 영월은 잔잔하게 현의 말에 대답한다.
현이 머릿수건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화제를 꺼낸다. 김은 수건값과 댕기값이 일 년에 얼마나 드는 줄 아느냐고 그걸 없앤 걸 자랑스러워한다. 현은 생활 개선이란 명목으로 여자들의 그까짓 멋마저 앗아가는 처사에 분개한다. 문화를 모른다고 현은 김을 욕하고, 김은 현더러 세상 물정에 어둡다며 언쟁을 한다. 분위기가 어수선한 걸 수습하려고 영월은 장고를 가져다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박은 따라 부르다 괜히 눈물을 흘린다. 김은 보이를 불러 유성기를 가져오라 한 뒤, 기생들과 어우러져 댄스를 춘다. 현은 그 틈에 영월과 못 다 한 얘기를 나눈다. 그동안 그리웠다고 하자 영월은 고맙다고 인사한다.
김이 댄스를 추고 난 뒤, 현은 댄스를 추는 것에 혐오감을 표한다. 풍류가 있는 기생 문화를 버리고 서양 댄스를 즐기는 부류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었다. 영월은 돈을 벌기 위해 못 하는 댄스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생도 돈이 있어야 하겠더라고 말한다. 남자를 만나 따라갔다가 그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기생의 신세고 보니, 돈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은 이 말을 듣고는, 자네들도 이제 실속을 차리라고 충고한다. 그러다가 현이 김의 얼굴에 컵을 던지는 바람에 술판이 깨지고 만다. 현은 박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온다.
강가를 걷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란 말이 떠오른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는 뜻이다. 현은 술이 확 깬다. '이상견빙지'라고 되풀이하여 중얼거린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
이 작품은 소설가인 현이 평양에서 교사일을 하는 친구 박과 평양 부회 의원이 된 친일 실업가 김을 오랜만에 만나 요릿집에서 회포를 푸는 내용의 소설이다. 친일적으로 변절한 김과 조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고뇌하는 현의 대화를 통해 작자는 일제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애정과 굳은 민족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작자로 설정된 주인공은 이태준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태준은 현의 눈을 통해 고통스러운 일제 강점기의 참혹함을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패강랭』은 이태준의 작자적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의 소설 세계에서는 약간 특이한 작품이다. 혼탁한 사회에서 초라하게 밀려난 존재인 소설가와 선생의 자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가치를 세속적인 가치보다 우위에 놓는 한편, 예술을 존중하는 주제 의식이 '김'으로 대변된 현실 사회의 기성 가치 체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는 점에서 약간 이질적이다. 이태준은 실제로 패배한 주인공 '현' 속에서 반항의 목소리를 높이는 딜레탕티즘과 상고취미(尙古趣味)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이태준의 딜레탕시즘은 일상적이고 비속한 것을 다 귀찮은 것으로 치부케 하고, 비일상적이고 '고운' 것만을 애호할 만한 것으로 생각게 한다. 거기에서 그의 주인공들의 생활의 패배가 연유한다.
이태준의 소설은 소외된 자의 설움을 잔잔하게 그린다는 데 있다. 그의 소설은 잔잔한 페이소스(애상감)가 드리워지면서 생활의 애환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패강랭』에서는 '현'이라는 주인공이 오랜만에 평양을 찾아와, 거기서 삶의 비애를 느낀다는 줄거리를 통해 역시 그러한 일면이 드러나고 있다. 소설 첫머리에서 주인공 '현'이 평양 대동강 부근을 묘사하는 대목은 주제의 방향을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세밀하게 묘사된 풍광에서 '유구한 맛'을 느끼게 하지만, 지금은 그저 오래된 느낌만 남고 쓸쓸해 보이기만 한다. 서글픈 풍경 저편에는 상실의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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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정체성은 분명히 과거의 삶에서 형성되었고, 또 뿌리를 과거에 둔 것이 확실하면서도, 과거의 삶이 현재는 너무나 미력하다는 인식에 비애감을 느낀다. 머릿수건이 사라지고 기생이 퇴조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현의 내면은 옛 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어 있음을 말하며, 그러한 옛 것의 격조를 퇴색케 하는 시대적 흐름에 그는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시대적 흐름에 소외된 자의 페이소스를 드러낸다. 시대의 흐름은 '격조를 생각하지 않고 돈으로 가치를 재는 시대로' '정신주의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태로' 변화하고 있다. 주인공 현이 지니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이제 자신만에 해당하는 것이지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 자식? 되나 안 되나 우린 이래뵈두 예술가다! 예술가 이상이다. 이 자식…."하고 내뱉는 그의 말은 분명 시대적 흐름에서 소외된 자의 아픔인 것이다. 대동강의 풍경, 평양 거리의 모습, 정거장에 마중 온 박의 모습 등은 모두가 하나같이 쇠퇴해 가고 있는 모습이며, 이러한 모습은 주인공 현의 내면이 투영된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태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 대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슬픈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잘 편승하고 있는 자가 바로 '김'이다. 그는 부회의원으로서 경세가이다. '현'은 그런 그를 속물이라고 울분을 터뜨리지만 '현'이 분개한 것은 '김'이 아니라 '김'으로 대표되는 세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김'과 다투고 강변을 거닐면서 '현'은 <주역>에 나오는 "이상견빙지"란 글귀를 문득 떠올리는데,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올 얼음을 각오하라는 말이다. 지금이 서리라면 앞으로 서리보다 더한 얼음의 참담함이 온다는 것이다. 그 말을 생각하는 현의 가슴은 더 짙은 비애감에 잠기며, 대동강 물이 언 것처럼 세상은 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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