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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편소설 『천우학(千羽鶴)』

by 언덕에서 2023. 3. 15.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편소설 『천우학(千羽鶴)』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장편소설로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여러 잡지에 나누어 실었고, 1952년 마지막 원고를 남기고 미완인 채 장편소설 <산소리>와 합쳐져서 간행되었다. 1953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전집>에 마지막호까지 실었다. 속편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소설신조(小說新潮)]에 <파센죠(波千鳥)>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장편소설 『천우학』은 패전 후에 황폐해진 일본의 산과 들에 남아 있는 일본미를 찾아보려는 저자의 심상과 자세가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발표 그해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작품 속에는 다기(茶器)와 차()의 세계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비속화된 차문화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나타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으며 1924년 도쿄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즈의 무희> <금수> <산소리> <명인> <설국> <말기의 눈> 등 명작을 많이 남겼으며,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마쿠라에 위치한 엔가쿠지(円覺寺)란 절의 다회(茶會)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기쿠지(菊治)는 다도(茶道) 대가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산다.  그러다 어느 날 가마쿠라 엔카쿠지에서 열리는 다회(茶會)의 초대장을 받는다.  4년 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엄마도 그 후 돌아가신 뒤, 다도 선생으로 자리 잡은 구리모토 치카코가 주인공 기쿠지에게 맞선을 주선해 준다며 자신의 다회에 초청한 것이다. 엔가쿠지는 유서 깊은 임제종 사찰이다. 죽은 아버지의 애인 치카코가 주최한 다회에 참여한 기쿠지는 아버지의 또 다른 연인이었던 오타 부인과 그녀의 딸 후미코를 만난다. 

 기쿠지는 아버지의 외도로 고통받던 어머니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약회사의 주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기쿠지의 아버지는 다도를 취미로 삼았는데, 다도를 배우던 구리모토 치카코와 불륜을 저질렀다. 또 다도 친구인 오타가 죽으면서 명품인 다구(茶具)를 부탁했는데 그는 다구뿐만 아니라 미망인이 된 오타의 부인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기쿠지는 다회에서 만난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오타 부인과 패륜의 관계 즉,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그의 딸 후미코까지 사랑하게 된다. 오타 부인은 자신을 자책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기쿠지는 그 자책감으로 오타부인이 죽은 후에는 그 딸인 후미코와도 관계를 맺으면서 일반적인 상식이나 도덕규범에서 벗어난 소위 마계의 늪에서 빠진다. 이때 기쿠지에게 구원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치유 또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닌 '천 마리 학' 모양의 보자기를 들고 다회에 참석했던 이나무라 유키코다. 기쿠지의 맞선 상대였던 유키코는 아름답고 순결하고 성스러워 영원의 여성이란 이미지를 상징한다. 하지만 기쿠지는 범접하기 어려운 이나무라 유키코보다는 자신의 엄마를 용서해 달라며 기쿠지에게 용서와 이해를 요구하는 후미코에게서 오히려 위로를 얻으며 소생의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딸 후미코 역시 여자의 숙명을 한탄하다가 어머니가 물려준 찻잔(茶盞)을 깨뜨려버리고 실종된다. 이후 기쿠지는 유키코와 결혼한다.

소설 '천우학'에서 다회가 열린 장소인 가마쿠라 엔가쿠지.

 

 줄거리만 놓고 보면 불륜과 삼류 막장 소설의 요소가 골고루 갖춰져 있어 민망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거부감은 사라지고 묘한 매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의 거미줄에 걸려들면 외설도 천박함도 허무한 아름다움에 자리를 빼앗겨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케가미에 있는 절 혼몬사(本門寺) 숲의 석양이었다. 붉은 석양은 마치 숲의 나뭇가지 끝을 스치며 흘러가는 듯 보였다. 숲은 노을 진 하늘에 검게 떠올라 있었다. … 기쿠지는 눈을 감았다. 나무 꼭대기를 흐르는 석양이 지친 눈에 스며들자 기쿠지는 눈을 감았다. 기쿠지의 눈 속에 남은 노을 진 하늘에서 보자기에 그려진 천마리 학이 날고 있는 영상이 문득 나타나는 것이었다...'  주인공 기쿠지가 오타 부인과 함께 있다가 돌아오는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는 죽음도 외설도 한낱 멀리 있는 대상이나 현상에 불과하다. 작가는 직접 이야기에 뛰어들어 개입하거나 가치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소설의 장면은 하나하나가 매우 완벽한 상징이다. 오타 부인이 사용하던 입술연지 자국이 남은 찻잔을 그의 딸이 기쿠지 앞에서 산산조각 내는 장면은 소설의 절정이다.

  "3, 4백년 전 옛날 찻잔은… 생명력이 퍼져 있어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 아버지의 수명이 찻잔 수명의 몇 분의 일에 지나지 않을 만큼 짧아서…."

 비록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신뢰를 깨뜨리고, 모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깨뜨렸지만, 주인공은 산산조각 난 조각들을 주워 모아 고이 포장해서 벽장 속에 간직한다. 작가는 찻잔 하나로 소설의 모든 관계망을 설명하고, 삶과 죽음과 관능을 모두 암시한다.

 

 

 주인공 기쿠지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노을 진 하늘'과 교감한다. 단순한 미화라기보다는 소설 기법 상의 치환으로 현세에서 벌어진 일을 부지불식간에 노을이 벌인 일로 변화시킨 부분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들은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만날 수 있다. 소설 『천우학』을 읽다 보면 어떤 외설적인 이야기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적막한 다실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천우학』은 멸망해 가는 일본의 슬픈 아름다움 이외는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패전 후의 작자의 심경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퇴폐의 정화(淨化)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센바즈루’는 일본 여성의 옷 무늬의 일종으로, 수많은 학(鶴)의 모양을 물들인 무늬를 가리킨다. 후일, 가와바타는 "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보다는 비속화된 다도문화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라고 말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얄팍하게 번민하는 건 죽은 사람을 욕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어떤 도덕도 강요하지 않는다." 이처럼 작가는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기쿠지에게 망부(亡父)의 애인 치카코와 또 다른 애인 오타 미망인 및 그의 딸 후미코를 얽히게 이야기를 구성한다. 퇴폐적이고 부정적 조건이기에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고서는 이내 꺼진(자살한) 오타 미망인의 정열의 아름다움, 후미코의 생의 아름다움이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