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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미셀 깽 장편소설 『처절한 정원(Effroyables Jardins)』

by 언덕에서 2023. 3. 20.

 

 

미셀 깽 장편소설 『처절한 정원(Effroyables Jardins)』

 

프랑스 소설가 미셀 깽(Michel Quint, 1949~)의 장편소설로 2001년 출간되었다. 소설은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틈만 나면 어릿광대로 분장해서 남을 웃기는 아버지를 창피해하다가 삼촌으로부터 집안의 비밀을 듣고 아버지를 이해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에 삼촌이 전해주는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이야기가 매우 극적이면서 감동적이다. 체험과 상상, 자서전과 허구를 자연스럽게 뒤섞은 이 소설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와 개인의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이 나오기 직전인 1999년 10월 프랑스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모리스 파퐁 재판>으로 떠들썩했다. 파리 경찰국장, 예산장관 등 고위 관리로 떵떵거리며 살던 모리스 파퐁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59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죽음의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보냈다는 것이 밝혀져 16년간의 긴 재판 끝에 형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과 맞물려 장편소설 『처절한 정원』이 주목받으며 큰 인기를 누렸다.

 『처절한 정원』은 출간 후 1년 넘게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일본, 대만 등지에 저작권이 팔려나갔다. 프랑스의 판매대리인들이 이 책을 읽은 뒤 전국 서점에 배포하기 시작했고 곧 파리의 서점들이 이 책을 권장도서로 선정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전 장관 파퐁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화자의 아버지와 삼촌은 1942년 말, 1943년 초 레지스탕스 세포 조직에 가담하여 변압기를 폭파한다. 곧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범인 대신 처형될 인질로 잡혀 진흙 구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때 어릿광대 출신인 독일 병사가 구덩이에 갇힌 포로들의 두려움을 덜어준다.

 진범이 나타나지 않으면 제비 뽑기로 한 명이 뽑혀 총살당하는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진범이 잡혀 풀려난다. 변압기를 폭파한 진범인 아버지와 삼촌은 자신들을 대신해 죽은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아내로부터 감동적인 진실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린다.

 독일군이 물러간 뒤 아버지는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삶을 산다. 아버지가 창피하기만 하던 화자는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꾼다.

 마지막 부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일이 되면 저는 눈에 검은 칠을 하고 양볼에는 빨간 동그라미를 그릴 것입니다. 내일 저는 밤나무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그 숲에서 마지막 미소를 거둔 그들을 대신하여 존재하려고 합니다”라며 자신도 어릿광대가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프랑스 소설가 미셀 깽 (Michel Quint, 1949~)

 

 소설은 재판으로 시작된다. 그것도 보통 재판이 아닌 바로 보르도에서 열리는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다. 나이가 아흔 살에 가까운 모리스 파퐁은 드골 정권 때 파리 경찰국장과 예산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전후 콜라보(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있었음에도, 나치 시절 유태인들(어린이들까지도)을 죽음의 열차로 보낸 과거 행적을 50년 동안 숨길 수 있었던 그는 한 역사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기어이 꼬리가 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반인륜적 범죄에 관한 책이 아니라 범죄 속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에 관한 내용이다. 미셸 깽은 이 책을, 베르뎅의 전사였던 그의 할아버지와 교사이며 레지스탕스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헌정하고 있다. 아주 짧은 역사인 가족사의 한 토막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체험과 상상, 자서전과 허구를 자연스럽게 뒤섞어 놓았다. 감각적이고 유머러스한 그의 문체는 재미있으며 시로 가득 찬 우화 같은 이야기를 솟아나게 하였다. 깽은 기쁨과 진실, 우정을 말하고, 또 이것들을 정직함과 관대함 속에 자리 잡게 하는 겸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이 있을 수 있는가?"

 

 

 역사학자 마이클 슬리틴은 파퐁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1981년에 한 주간지에 파퐁의 반인륜적 범죄를 낱낱이 증언했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비시 정권하에서 보르도 지역의 치안 부책임자였다. 그는 1942년에서부터 1944년까지 1,590명의 유태인을 체포하여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다. 희생자 유족들의 고발로 모르스 파퐁은 1983년에 정식 기소됐다.

 그러나 모리스 파퐁을 법정에 세우기까지는 1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한동안 비시 정권하에 있었던 관리들의 수동적 행위를 단죄할 수 있는가의 논란이 야기됐기 때문이다. 파퐁 자신도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또한 파퐁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사실 확인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드골 정권 등 전후의 정권에 대한 평가와 역사 해석 문제와 맞물려 여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1995년 쟈크 시라크 대통령이 취임하여 유태인 강제수용에 대한 프랑스의 국가적 책임을 처음으로 시인한 후에야 비로소 모리스 파퐁에 대한 응징이 본격화되었다. 1997년 보르도 항소법원이 모리스 파퐁을 재판에 회부했고, 6개월 후에 그는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그 결과가 나오기 직전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결국 스위스의 스티 휴양지 그스타트에서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1999년 당시 89세인 모리스 파퐁은 감옥에서 생을 마쳐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따로 없고, 예외가 없다는 것이 프랑스와 유럽국가들의 변치 않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일제 강점기 친일인사들의 반민족적 행위나 위안부 등에 행한 일제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청산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