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한 장편소설 『노천(露天)에서』
박영한(朴榮漢. 1947∼2006)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1981년 [중앙일보사]에서 단행본으로 발표되었고, 1987년 [고려원]에서 개작(수정) 발간되었다. 원고지 1천 장의 자전적 장편소설로 장편소설 <머나먼 쏭바강>, 중편소설 <인간의 새벽>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방황하는 젊음의 모습을 고백한 장편소설로 ‘젊은이들이 서 있는 곳은 자신을 가릴 덮개 하나 없는 노천이며 끝 모를 길 위’라는 메시지를 담은 성장소설이다. 1980년 [부산일보]에 연재된 내용을 개작하여 1981년 단행본으로 최초 발간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월남전의 체험을 그렸던 종전 작품세계에서 벗어나 그의 문학 세계를 넓히는 획기적 변신을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극빈과 병마라는 옥죄어진 사회현실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견디며 이끌어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월남전을 다룬 작품에서도 국가적 격변기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자기 존립의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등장시켰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추구하는 주제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후 작가는 이 작품을 개작하여 1994년 12월 <첫사랑>(민음사)이라는 장편소설을 내놓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60년대 후반의 항구도시, 젊은 청년 ‘나’는 끼니를 이어갈 길조차 없는 가난 속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좌절을 안고 사회 속에 던져진다. 지방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년 동안 잇단 가출과 노숙, 방황, 좀도둑질, 거리에서의 싸움, 홍등가 출입 등 황폐한 노천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한 이유는 정신병에 걸린 이복형과 난치병에 죽음을 앞둔 친형과 어머니, 돌보아야 할 동생들, 산꼭대기 판잣집에서 끼니를 매일 걱정해야 하는 생활고 때문이다. 나는 땟거리를 벌기 위해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의과대학 입시공부를 하지만 해마다 낙방한다. 나는 부유한 집안의 딸, 묵화라는 처녀를 사모하나 그녀에게 번연히 외면당한다.
애란이라는 홍등가의 여인만이 가난한 '나'를 이해하여 먹이고 재운다. 나는 가족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해수욕장에서 악사(樂師)를,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철강 공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밤이면 대학 입시 공부를 한다. 해마다 대학에 낙방한 것은 의과대학을 지망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시)을 하게 되는 것만을 유일한 구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입대 연기를 여러 번 한 탓에 입대 영장을 받은 상태다.
그 와중에 나는 술을 마신 후 일하던 철강 공장의 동료나 사창가의 창녀, 기둥서방들과 싸움질하다 경찰에 연행되어 철장 생활을 한다. 그때마다 친구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곤 한다. 감방 내에서 온갖 부조리가 횡행하는 현실에 나는 저항한다. 대학 입시를 얼마 앞두고 어머니와 큰형이 지병으로 사망한다. 복덕방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 입시를 치른 나는 과(科) 수석으로 합격하지만, 학비를 마련할 길이란 막연하기만 하다.
대학에 입학 수속만 밟고 입학식 다음날 입대한다. 자대에 배치 받은 나는 월남전을 지원하여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제대 후 대학에 다닐 등록금을 마련할 계획을 세운다. 창녀 애란에게 받은 금가락지를 부대 인사과 간부에게 뇌물로 바친 끝에 월남 파병이 확정된다. 나는 파병 직전에 마지막으로 애란을 만나러 바닷가 사창가를 찾지만, 애란은 그곳에 없다. 수소문 끝에 의정부의 미군 부대 근처에서 양공주가 되어 있는 애란을 찾는다. 여관에서 미군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애란을 겨우 발견한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어두운 터널로 향하면서 소설을 끝난다.
‘이것은 저 곤혹스러웠던 젊은 날 노상에서의 수업에 관한 얘기다. 철없던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고 이윽고는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자각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나의 길 위에는 여러 가지 순조롭지 못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읽는 이에 따라 이 소설은 자신의 그것과 동떨어진 특수 체험인 경우도 있겠으나 어쩌면 다행히도 자신의 그것과 유사한 체험인 독자들도 있으리라. (중략) 아무튼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내적 외적 억압을 어떻게 혼신의 힘으로 맞받아 뒤젖히며 뚫고 나가는가가 이 소설의 메시지일 터인데, 이 점 독자에게 가슴으로 와닿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큰 바람이다. 번뇌하며 탐구하는 인간에게 수업의 끝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산송장으로 매장되지 못하고 버려졌던 작은형은 천부적으로 새로운 수업이 시작되는 노상에 외로이 서 있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리라.’ - 저자 서문에서
1960년대 말의 경제개발계획은 산꼭대기에 사는 빈민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작품은 자신이 겪은 20대의 고뇌를 통해 비정한 외계와 자기 각성을 시작한 인간 내면과의 치열한 싸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시도한 붙임 글(초판: 작품의 군데군데에 읽기 힘들 정도로 긴 분량으로 나타난다)로 해서 더욱 절실해진다. 낯선 부호·음표·상호 등이 뒤섞인 붙임 글은 이중 삼중으로 분열된 젊은 의식을 잘 표현하려는 시도로 주목받는다.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 <머나먼 쏭바강>의 전작(前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대표작 <머나먼 쏭바강>은 대학생인 실제 저자가 궁핍과 절망을 넘기 위해 베트남전 파병부대에 자원입대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형과 어머니의 질병과 어려운 가정형편 등으로 사글셋방을 전전하며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공장이나 부두 노동자, 거리의 악사 등을 하며 부랑아의 모습으로 노천에서 방황과 도둑질, 싸움질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불우한 과거는 작품 『노천에서』에 잘 그려져 있지만 드라마나 영화로도 유명한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도 주인공의 남루한 모습은 또 다른 자화상의 하나이다. 그런데 「노천에서」와 시리즈로 연결되는 두 작품이 있다. <첫사랑><1994)와 <카르마>(2002)가 그것이다.
♣
박영한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와병과 정신병에 걸린 이복형, 중병에 걸린 큰형 등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가산이 바닥나는 바람에 그의 가족은 부산의 부전동 · 전포동 · 초량동 등지로 쫓기듯이 이사를 다닌다. 1963년 그는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그 무렵은 그의 가족이 부산 초량동 산동네의 오두막 사글셋방을 전전하던 극빈의 시절과 겹치기도 한다. 작가의 스무 살 안팎 때의 자전적 체험이 짙게 배어 있는 「노천에서」에서 그 시절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어머니는 추악하게 병들었다. 육모초 냄새와 담배쌈지의 풍년초 냄새. 병자의 몸에서 나는 시체 냄새. 20년 동안 그 냄새와 살아왔다. 20년 동안. 나는 그 냄새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묵화는 탈출구였다. 가수가 되겠다던 작은형은 3년 전에 집을 나갔다. 두 동생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큰동생은 건재상의 리어카를 끌었다. 막내는 어렸다. 가정교사를 마치고 오자 큰형이 과도를 들이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게거품을 물고 눈자위를 허옇게 까뒤집으며 큰형이 돌진해 왔다. 막내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문을 발길로 찼다. 나는 간장독을 들어 형을 내리쳤다. 나는 공포에 뒤쫓기며 집을 뛰쳐나왔었다. 가축우리나 매한가지인, 여섯 식구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우글대는 단칸 토방, 그 세계는 탈출할 길 없는 나의 소우주 나의 감옥이었다.’
장편소설「노천에서」 발표 이후 박영한은 세번째 장편소설 <첫사랑>(1994)을 발표한다. <첫사랑> 역시 상처투성이의 젊은이를 묘사한 소설로 청년 박영한이 구차한 목숨을 갖다 버리고 싶어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까지, 1970년대의 거짓 유토피아 속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빈곤과 인간소외와 절망, "가난이란 원죄" 그리고 "극복을 위한 탈출"을 향한 문학과의 조우가 거칠고 고통스럽게 드러난 작품이다. 폐병과 가난, 우울에 찌든 난봉꾼들과 함께 한 스무세 살의 음화에도 반짝이는 열망이 하나 있다. "이 추악한 환경, 몽매에도 그리던 신분의 이동. 우리는 대학에 모두를 걸었다. 야망과 복수와 저항과 이 더러운 환경, 신분의 탈바꿈과 영양가 높은 맛난 음식과 문학 어머니 약값과."
2002년 발표된 중편소설 <카르마>에서는 '「노천에서」 → <첫사랑> → <카르마>'의 퍼즐 조각을 맞추며 매듭을 짓는다. 앞의 두 작품에서 드러난 상처가 아물며 세상과 화해를 하게 된다. 육모초 냄새와 풍년초 냄새, 병자의 시체 냄새를 풍기며 20년 동안 그의 지옥을 지키던 어머니가 강원도 오지의 '노롯재 상회'라는 구멍가게에서 만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불구의 주인 사내로 환생한다. 그를 괴롭힌, 정신병을 앓다가 객사한 큰형(이복형)과 작은형은 천부적으로 세상과 화해하기 힘든 배덕적 성향을 가진 이였다. 더 이상 그는 탈출만을 춤추던 지옥에서 만난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 1987년 수정판[고려원]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썼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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