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단편소설 『지도(地圖)의 암실(暗室)』
이상(李箱·김해경. 1910∼1937)의 단편소설로 1932년 [조선] 지에 비구(比久)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이상이 발표한 첫 소설 작품이다. 이 작품 『지도의 암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상이라는 작가의 문학이 시작하는 작품으로 간주된다. 이상이 쓴 열세 편의 소설 중 가장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암시와 함께 특유의 난해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문론으로 용납할 수 없는 문장을 구사하고, 정상적 문법을 교란한다. 또한, 근원적 차원에서 기존의 문법체계를 무시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2년에 이상 김해경은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라는 익명을 사용했다. 같은 해,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그러다 1933년 3월 객혈로 인해 건축 기수 직을 사임하고, 배천온천에서 폐병을 이기기 위해 요양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병환으로 인한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문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4년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 예정이던 것을 15회에서 중단해야 했다. 1936년에는 [조광] 지에 소설 <날개>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 <봉별기>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사망했다.
이 소설의 제목이나 주제, 글쓰기 양상에 대한 해석,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마다 관점이 달라 하나로 규합해 간추리기도 어렵다. 또한, 합의 가능한 지점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저마다의 관점에서 독해 가능한 문장으로 보는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독해 불가능한 문장이라고 판단하는 논자도 있다. 『지도의 암실』은 과도한 실험성의 큰 의의는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저평가되는가 하면, 매우 독창적인 기법과 고차원적인 정신의 형상성을 드러낸 대단한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화자인 ‘나(리상)’는 자신이 아는 ‘리상이라는 우스운 사람’의 하는 일을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한다. 예컨대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 “앙뿌을르(형광등)에 불이 확 켜지는 것은 그가 깨이는 것과 같다. 하면 이렇다. 즉 밝은 동안에 불인지 마안지 하는 얼마쯤이 그의 다섯 시간 뒤에 흐리멍덩히 달라붙은 한 시간과 같다. 하면 이렇다. 즉 그는 봉투에 싸여 없어진 지도 모르는 앙뿌을르를 보고 침구 속에 반쯤 강 삶아진 그의 몸뚱이를 보고 봉투는 침구라 생각한다. 봉투는 옷이다. 침구와 봉투와 그는 무엇을 배웠느냐.”
주인공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따라간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깃털처럼 많은 하루의 집적이며, 그 하루는 계절처럼 순환적이다. 이런 감각을 표현하려는 듯 주인공 리상의 하루는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 다시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끝난다.
(서울대 권영민에 의하면) 『지도의 암실』은 소설이라는 양식이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삶의 모든 경험적 요소들을 어떻게 하나의 통일체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에 해당한다. 이 소설의 서두에서 묘사하고 있는 방안의 풍경과 주인공인 ‘그’의 행동은 결말 부분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면서 소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결말에서도 똑같이 4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상은 이 같은 순환론적 시간의 인식 방법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서 시간의 지속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설 『지도의 암실』의 서사 구조는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의 속성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공적 시간 개념을 전복하는 시간에 대한 사적 체험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이러한 구성법은 경험적인 현실과 주체의 내적 의식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틈을 지양하기 위한 기법적인 모색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그 ‘미학적 위장’이 다분히 실험적이다. 그 이유는 작품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의 행위가 그 구체성을 잃고 있는 데에서 찾아진다. 주인공의 행위가 들어설 자리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념의 연쇄가 이어진다. 심지어는 이야기의 서술 과정에서 등장인물의 대화가 모두 생략되어 있거나 간접화되어 있다. 이 ‘추상화의 원칙’은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새로운 서사의 문법과 직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이상 소설전집(민음사) 작품 해설> 398~399쪽에서 인용함.
♣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상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 작품「지도의 암실」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작품도 어떤 사건, 행동 혹은 줄거리가 없다. 소설 속 인물들은 말과 행동을 통해 성격화되기보다 의식과 사고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는데 이상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법이 없고, 기존의 소설작법이나 서술방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단 자신만의 특수한 시각, 사물에 대한 지각에 충실해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록할 뿐이다.
「지도의 암실」이라는 소설 전체가 아포리아의 조합물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작품에는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과 삽화들, 앞뒤 문맥의 연결고리 생략 등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종잡을 수 없게 하는 난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일직선적인 독서의 과정을 방해하는 난제들은 독자가 맞닥뜨린 장애물 앞에 발길을 멈추고 이 부분적 난제들의 불명료한 의미를 소설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다시금 사유해 재구성하도록 요구한다. 이렇듯 다각도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서사의 기본적 의미 탐색마저도 쉽사리 허용치 않는 독특하고 난해한 텍스트”와 “다양한 해석을 종합하는 융합 연구의 부족”으로 여전히 미해독의 작품으로 남아있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초현실주의 문학의 기법과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식민지 상황 속에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그의 문학에는 무력한 자아가 중심이 되고 있지만, 억압되고 발산되지 못하는 인간 내부의 욕망을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로 활용하였다. 그는 파격적인 언어 실험과 기법을 통해 인간 의식의 내면에 대한 새로운 천착과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학의 내적 공간과 영역을 새롭게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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