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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상 단편소설 『단발(斷髮)』

by 언덕에서 2023. 2. 20.

 

이상 단편소설 『단발(斷髮)』

 


이상(李箱·김해경. 1910∼1937)의 단편소설로 작가 사망 2년 후 1939년 [조선문학]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줄거리가 빠져 있는데, 특정한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에 화자가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내용은 주인공이 친구의 여동생과 동반 자살을 꿈꾸다가 일본으로 함께 가려는 듯한 평범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편, 이상의 난해한 작품에 익숙한 독자와 평자들은 이에 가중된 (때로는 형이상학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본래 신경질적인 성격에다가 심한 폐결핵이었던 이상은 시대적인 지성적 고민에서 의식적으로 자기 학대를 감행하여 사생활에 있어서도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는데, 자신도 그 점을 반성하고, 1939년에 일본에 건너가 갱생을 시도했으나, 결국 28세로 요절했다. 이 작품은 이상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어난 사건을 작품으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고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한 소녀가 자신의 애인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머리를 자른 것이 이야기 전부이다. 이렇게 사전 규정하지 않고 소설 텍스트에 접근하면 난해함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상(李箱, 김해경. 1910-1937)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연(衍)’이라는 남자는 소녀와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연’은 소녀 오빠의 친구다. ‘연’은 어느 날 좀 무리인 줄 알면서 소녀에게 동반 자살(double suicide)을 제안(프러포즈) 해 본다.
 ‘위티시즘(재담)’과 ‘아이러니(모순)’를 ‘연’에게서 느끼는 소녀는 자신의 친구가 오빠와 애인 사이가 되어 함께 동경에 가기로 한 것에 충격을 받는다. 동경으로 떠날 오빠는 동생을 걱정하며 ‘연’에게 동생을 부탁한다.
 단발? 그는 또 한 번 가슴이 뜨끔했다. 이 편지는 필시 소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에게 의논 없이 소녀의 머리를 잘렸으니(소녀가 머리를 잘랐으니), 이것은 새로워진 소녀의 새로운 힘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이 났다. 왜? 머리를 자를 때 소녀의 마음이 필시 제 마음 가운데 제 손으로 제 애인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애인이 저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하게 한, 말하자면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1인 2역을 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영화 [금홍아 금홍아], 1997년 제작


 단편소설 『단발』은 크게 6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것들은 모두 주인공과 한 소녀의 연애 이야기다. 그 연애담은 결말을 향해 일관되게 순차적으로 흘러간다. 이 작품의 아이러니한 구조는 줄거리의 윤곽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서사 담론의 수사학적 애매함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의 독특한 짜임은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이 단편은 이상의 어떤 작품보다도 명확한 주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결말에 이르러 동경행(東京行)으로 상징된다. 동경으로의 떠남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근대의 정신과 감정을 응집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표면을 장식하는 연애 이야기는 이 결말에 종속될 뿐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내용은 연애가 아닌 동경으로의 떠남이다. 제목인 ‘단발’은 동경행이 품고 있는 의미와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할 수밖에 없다.

 


 이상은 중편소설 <12월 12일>을 비롯해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 <휴업과 사정> <지주회시> <날개> <동해> <종생기> <환시기> 「단발」 <봉별기> 등을 발표했다. 이 소설들에서 그려내고 있는 삶의 세계는 경험적 자아로서 작가 이상의 실제 삶과 자주 대비된다. 연구자 대부분은 소설에 등장하는 ‘나’라는 일인칭 주인공을 작가 이상으로 규정했으며, 상대역인 여성 주인공은 실제 인물인 ‘금홍’이나 ‘변동림’으로 바꿔버렸다.
 이상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엮어내는 신변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의도했던 실재성에 대한 환상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허구적 양식으로서 소설을 자신의 경험적 현실로 귀착시켰다. 작가의 내면과 작중인물 성격과의 거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접근 태도는 결국 소설 속 이야기를 작가의 실제 이야기로 읽는 오류를 초래했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소설은 도시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일상적 삶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性) 윤리와 그 문제성을 여러 유형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그가 소설을 통해 그려내는 개인의 삶은 대부분 일상의 기본 단위인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압축돼 나타난다. 특히 결혼과 가정이라는 사회제도에 감춰진 성과 욕망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일상에 숨겨져 있던 성의 문제성을 부각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전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내적 욕망의 해체를 시도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