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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편소설 『산소리(山の音)』

by 언덕에서 2022. 12. 7.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편소설 『산소리(山の音)』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장편소설로 1949년부터 1954년까지 5년에 걸쳐 [가이조분게이(改造文藝)] 등의 잡지에 나누어 실었고, 1954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발표된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적 걸작으로, [노마(野間)문예상]을 수상했다. 특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이자 탐미 문학의 상징인 미시마 유키오가 “소름 끼칠 정도로 기묘하고 아름답다”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한적한 산골 마을의 정경과 미묘한 계절의 변화를 섬세한 묘사와 농익은 문장으로 포착해낸 점은 이 작품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산소리’는 죽기 전에만 들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처럼, 작품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작품의 커다란 중추를 이루고 있다. 주인공 신고는 희미한 기억과 노쇠한 몸을 이끌고 친구들의 장례식을 가는 게 일상이 된 노인이다.  “머리를 몸통에서 떼어내 세탁물처럼 병원에 맡기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쇠약한 온몸으로 인생의 무게를 버텨낸다. 유머러스하게, 한편으론 묵직하게 그려지는 노년의 고뇌는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면서 마음 한구석을 슬프게 하는 차가움으로 텍스트의 저변에 드리워진다.

 장편소설 『산소리』는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하여 기쿠코라는 일본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그린 작품으로, 노년의 꿈과 각오, 비애, 권태, 고독 등을 계절의 흐름과 함께 그린 상징적 작품으로 ‘노인 문학’으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야스나리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영화 [산의 소리], 195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적한 가마쿠라 산골에 사는 초로의 노인 신고가 주인공이다. 예순둘이 된 그는 온몸이 낡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흰머리가 성성하다 못해 눈앞에서 세어버리고, 이유 없이 객혈하며, 40년 동안 손에 익은 넥타이를 두고 매는 법을 잊어버려 망연자실 한다. 불안해하던 그에게 ‘산소리’는 죽음의 예고처럼 다가오고 평온했던 일상은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불륜을 일삼아 전쟁미망인을 임신시키는가 하면 아내 기쿠코를 낙태시키는 등 외도와 폭력을 일삼는 아들 슈이치, 술과 마약에 절어 자살 소동까지 벌인 사위 아이하라, 결혼에 실패해 내쫓기듯 친정으로 돌아온 딸 후사코, 부모의 불화 아래 고집불통으로 자란 손녀 사토코까지. 자식들의 불행을 방관했다는 압박과 회한에 사로잡힌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며느리 기쿠코뿐이다. 세월을 거스른 절절한 연정 그리고 사그라지지 않는 금기의 욕망이 꿈과 현실을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피어오른다.

 환갑이 지난 노인 신고는 한밤중에 뒷산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고 죽음에 대한 예고가 아닌가 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젊은 시절 신고는 아름다운 처형을 연모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후 일찍 죽었다.

 그 이루지 못한 사랑의 미련을 마음에 품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다 죽음이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신고는 며느리 기쿠코와 꿈이라는 환상을 통해 사랑의 충족을 경험한다. 끝내 가지지 못한, 지나간 시절의, 여인을 향한 집요한 갈망, 그리고 가져서는 안 되는 아들의 여인을 향한 위험한 정열이 신고의 심리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고는 며느리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갖고 대하지만 분명히 자애로운 시아버지다. 반면, 며느리 기쿠코는 남편과 이혼하더라도 신고 곁에 있고 싶다고 표현할 정도로 시아버지를 존경한다.

 주인공 신고는 '꿈'속에서 무인도에서 낯선 여인과 뒹구는가 하면, 낙태한 열네댓 살 소녀가 성녀(聖女)가 되는 소설을 읽고 아들과 혼담이 오갔던 여인의 가슴을 만지기도 한다. 몽환 세계에서 굴절되어 드러난 며느리 기쿠코에 대한 애틋한 욕망은 단순히 주책맞은 노인의 색욕이나 일탈로 매도할 수 없다. 엄격한 도덕의식에서 해방되어 즐기는 매혹적인 성(性)의 유희이자,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규범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본연의 고뇌인 셈이다.  

 소설의 끝부분은 신고가 아내와 아들 부부, 딸에게 아내의 친정 동네로 구경가자고 의논하는 장면이다. 그때 딸 후사코가 분가하여 술집이라도 차리겠다고 말하자 며느리 기쿠코가 자신도 돕겠다고 말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영화 [산의 소리], 1954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정경 묘사와 유려한 문체로 세계를 전율시켰던 가와바타가 50세가 되던 해에 써 내려간 대작이 바로 『산소리』다. <이즈의 무희>가 그의 청년기를 <설국>이 가와바타의 중년기를 대표한다면, 단연 『산소리』는 삶의 연륜과 예술적 완결성을 두루 갖춘 만년의 걸작이다. 가와바타 문학의 저변을 이루는 짙은 허무와 고독,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고유한 미의식은 한층 더 깊어진 동시에, 전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성과 욕망에 대한 절묘하고도 과감한 접근이 돋보인다.

 소설은 초로에 접어든 신고가 죽음을 예견하는 ‘산소리’를 듣게 된 후 벌어지는 불행과 혼돈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하루하루 소멸을 향해 치닫는 노년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담백하게 표현한다. 한편, 동경했던 여인에게 품은 금기의 욕망을 '꿈'이라는 공간을 빌려 과감하게 풀어내어 서술한다.

 참전 후 외도와 폭력을 일삼는 슈이치, 술과 마약에 절은 아이하라,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기누코까지, 불행의 덫에 걸려 신음하는 인간 군상을 통해 패전이 일본에 가져온 충격과 황폐함을 드러내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진다.

 

 

 장편소설 『산소리』는 1949년에 쓰이기 시작하여 5년간 세심한 손질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패전 직후 미국 군정이 실시되던 시기에 탄생한 만큼, 소설 곳곳에는 일본인들의 정신적 충격과 또 다른 억압에 짓눌리는 공허함이 시대의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신고는 태평양 전쟁을 거치며 성불구자가 되고, 아들인 슈이치는 전쟁터에서 몸에 밴 폭력과 타락 때문에 기누코라는 여자와 불륜에 빠진다. 기누코는 전쟁으로 남편과 아이를 모두 잃은 전쟁미망인이다. 그런가 하면 딸 후사코는 남편이 마약중독자로 폐인이 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다. 퇴폐와 무력감에 취해 비틀거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은 곧, 폭력과 상실감으로 점철된 근대 일본의 단면 그 자체다.

  그러나 『산소리』에서 그려진 노년은 쓸쓸한 허무의 세계로만 수렴되지 않는다. 작품 곳곳에는 죽음과 욕망이라는 두 가지 오래된 금기에 과감하게 균열을 내며, 현실에서 쉽게 맛보지 못할 위로를 만든다. 시아버지의 굴절된 시간 의식이 빚어낸 현실과 몽환의 세계가 교류하는 공간을 만들어, 그속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팽팽한 긴장 속에서 또 다른 미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초래한 죽음의 냄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기묘하고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장편소설 『산소리』는 제7회 [노마문예상]을 수상하며 전후 일본 문학의 최고봉으로 자리매김했다.